한해의 마지막달, 12월.
마침내 올해 특히나 아름다왔던 노랑, 빨강 단풍잎들이 모두 떨어지고, 그제는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는 첫눈도 흩날리며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겨울, 나와과 상극관계인 바로 겨울이 온것이다. 추운 것에 질색하는 감자는 연말이 오면 일단 문밖에 나가는 것조차 고통이며, 슬그머니 우울증도 찾아 온다. 웬지 일년동안 한 것이 없는 것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 잡히고, 40일간 밀린 여름 방학 그림일기를 하루만에 끝내야 하는 초등학생처럼 히스테리 증상도 나타난다. 어릴 적 부터 그랬다. 한해도 빠짐없이 연말이면 찾아오는 증상들…
딱 두 해 그렇지 않는 적이 있었는데, 호주 어학연수하던 시절 연말을 뜨거운 여름 속에서 보낸 그 두 해를 제외하고, 나의 기억으로는 6살 때부터 변함 없이 연말 우울증이 찾아온다.
올해도 기온이 영하 근처를 맴돌기 시작하던 날, 혼자 작업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생각했다.
대체 난 한해동안 무었을 했을까? 나름 정신 없게 살았는데,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다. 별로 한게 없나? 잠시 우울해졌다가 무심코 목록을 적기 시작했다. 1월 부터 차곡 차곡, 새로 배운것들, 알게된 사람들, 가본 곳들, 처음 먹어본 것들, 10원 단위까지의 수입, 얻은 것들, 새로 가입한 동호회나 클럽, 싸이트, 실패한 것들, 그로 인해 얻은 것들, 결심한 것들, 했다가 포기한것들 까지 기억이 안나면 한해동안의 사진(땡큐 스마트폰~)을 뒤적이며 꼼꼼히 적기 시작했다. 수영할 때 새로 익숙해 진 호흡법 같은 매우 사소한 것까지… 그리곤, 깜짝! 노트 3장을 꼬박 채우고도 아직 12월에 도착하지 못한 것이다. 오오…나도 그렇게 막 산것은 아니구나. 사소할 지라도, 실패했든, 성공했든, 이것 저것 많은 일들을 했구나!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니 첫번 째 돌아오는 것은 역시 식욕,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가나가사키 짬뽕을 끓이기 시작했다.하얀 매콤한 국물을 후루룩 들이키고나니 뱃속이 뜨끈한게 좀전에 느꼈던 우울증은 어디로 갔는지 모두 사라지고, 내가 기특하다는 생각 마저 든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든 생각은 ‘원조 나가사키 짬뽕이 정말 이런 맛일까?’
이렇게 나의 ‘한해 동안 수고 했어, 토닥토닥 선물’이 정해졌다. 그래서 노트의 마지막장에 큼지막하게 적어 보았다.
“나에게 원조 나가사키 짬뽕을 먹여주자!”
그런데, 며칠 뒤 신기한 일이 생겼다.
하모니크루즈 이벤트에 선정이 된것이다. 그것도 신기하게 기항지가 나가사키. 신청할 때 대략 보면서 후쿠오카라고 생각했던 기항지가 사실은 나가사키였던 것이 그냥 우연일까?
대뜸 떠오른 성경의 몇몇 구절과 몇 년 전 유행했던 시크릿 책과 엄마가 귀에 못이 박히게 하시는 말씀 등 여러가지가 떠올랐다. 원하는 것을 간절히 눈물을 흘리며, 안될까 걱정하며 바랄 필요가 없다. 깔끔하게 한번만, 그러나 매우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또박또박 소리 내서 이야기 하거나, 잘보이는 곳에 적어두면 된다고 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어쨌든, 정말 됐다!
그래서, 나는 내일 짬뽕 국물, 온천 물, 물! 물! 물여행을 떠난다.
일년 동안 잘했든 못했든 나름 열심히 바둥바둥 살았던 나에게 나가사키 짬뽕을 먹여주러…럭셔리한 크루즈 안의 우아한 선상의 저녁식사와 온천의 도시, 벳부에서의 뜨끈한 하루는 선물 속의 덤 ^^
누구나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한해가 다 가는데, 난 또 무었을 했나? 하는 질문.
그런데, 이거, 그냥 찬바람이 가져다 주는 장난일 뿐이다. 여기에 넘어가지 우울해 하지 말자. 내가 호주에서 격었듯이 따뜻함을 채워주시거나 아니면 세세히 일 년 동안 한 것을 적은 노트 한 권이면 이 글을 읽는 분들 모두 기분 좋게 연말을 맞이하실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꼭 무엇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름 내 안에서 바둥바둥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그런 당신에게 작은 연말 선물을 하나 쯤 안겨 주는 것은 어떨까?
난생 처음 크루즈 프롤로그
2012.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