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제주의 매력을 즐길 수 있는 '쉼'이 있는 길
하갈비 국수로 든든하게 배를 채운 후 아버지가 낚시를 하신다길래 서쪽 해안도로를 따라 귀덕마을로 내려갔다. 이곳 방파제가 물이 들어오면 낚시하기 좋은 듯 해서 아버지를 내려드리고, 나는 근처의 추억이 깃든 작은 카페에서 오이군과 동생과 함께 카페놀이를 하기 위해서 였다.
귀덕마을은 제주 1년살기를 하러 내려왔을 때 첫 두달을 보냈던 곳으로 우리에게는 제주의 고향같은, 추억이 듬뿍 묻어 있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나의 기억속에 기분좋게 자리잡은 곳은 귀덕-한림해안도로.
그러나 이 해안도로의 이름을 듣고는 고개를 갸우뚱 하는 분들이 많으시리라. 왜냐하면 이 도로는 제주 서쪽의 얼굴마담인 비양도나 차귀도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풍차가 늘어서 있거나, 웅장한 절벽이 있는 것도, 흰모래가 펼쳐진 제주의 하늘빛 바다가 보이는 것도 아니라 딱히 이름을 날릴만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냥 한쪽으로는 푸른 바다로 이어지는 현무암 해변이, 한쪽으로는 제주의 작은 시골마을과 들판이 늘어서 있는 평평한 해변도로일 뿐.
그런데, 우리가 이곳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 바로 그 때문이었다.
딱히 엄청난 것이 없다보니 어느 계절에 가도 관광객이 없어서 우리끼리 찬찬히 제주의 여유를 만끽하기에 좋았다. 유명한 무언가는 없지만 메밀꽃이 가득핀 현무암 돌담 사이를 거닐거나 날씨에 따라 다채롭게 변하는 푸른바다와 현무암의 조합을 바라보며 잔잔한 제주살이의 매력을 한껏 음미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저녁이면 매일 봐도 질리지 않을 엄청난 일몰은 또 어떻고!
머물렀던 숙소에서 귀덕-한림 해안도로가 내려다 보였는데, 정말 노을이 단 하루도 놀랍지 않은 적이 없었다. 붉은 빛 주황 빛은 기본이고, 샛노란 날도 있었고, 핑크빛, 보라빛...노을빛이 그렇게 다양한 줄이야.
이 곳에서 살았던 덕분에 지금도 오이군은 이 세상에서 일몰이 가장 아름다운 곳은 제주의 서쪽이라고 말한다
무더운 여름날 아~무것도 없는 길을 따라가다보면 생각치 못한 지점에 툭하니 감성 돗는 카페가 하나씩 나타나 시원하게 목과 마음을 축일 수도 있었고, 인적이 드문 곳인데도 서프라이즈처럼 가끔 푸드 트럭이 등장했다. 그냥 모든 것이 우리가 기대했던 제주살이를 그대로 느낄 수 있던 곳.
세계여행한다고 여기저기 떠돌다가 3년만에 돌아오는 곳인데도, 이 길에 도착하는 순간 마치 지난주에 있었던 듯 친근하고, 겨우 1년 살았을 뿐인데도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 반가왔다.
대한민국 모든이들의 휴식같은 존재, 제주도. ^^
우리가 방파제를 거닐며 향수에 젖고, 낚시꾼들이 던져주는 생선을 기다리는 고양이와 노는 동안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뭘 잡냐고 물으시고, 주변 컨디션을 휘이 둘러보시더니 갑자기 낚시를 하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분다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비바람이 몰아쳐도, 몇 날 며칠 홀로 낚시만 해도 심심치 않다는 아버지가 웬일이시람. 그냥 혼자 낚시하기 보다는 오랜만에 자식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으신 듯하다.
어쨌든 그래서 낚시는 접어두고, 가족 모두 다 같이 카페놀이를 하자며 다시 길 위에 올랐다.
Plus Story : Travel Point
귀덕-한림 해안도로의 볼거리는 뭐가 있을까?
제주 영등할망 신화공원
(영등신화 소공원)
크게 유명한 길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볼거리가 없다는 소리가 아니다. 귀덕마을은 제주에 봄 꽃씨를 뿌려주는 바람의 신 영등할망이 음력 2월 초하루날 봄바람과 함께 제주로 들어오는 입구라고 전해지는 곳이다. 2월이면 시베리아에서 발원한 차가운 바람이 한국을 거쳐가는데, 이를 옛 제주사람들은 변덕스러운 영등할망이 봄바람을 몰고 왔다고 표현했다.
(이때쯤 제주에 방문한다면 변덕스럽고, 사나운 제주 바람의 정수를 제대로 만나볼 수 있다. 이때 표선 근처에 살았는데, 매일 건물 전체가 우우웅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고, 밖에 나갈 때 마다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 머리가 다 빠져 대머리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바람이 한달정도 끊임없이 지속되더라.)
영등하르방
세상의 북쪽 끝, 영등나라에 살며 온갖 종류의 바람의 씨를 만든다고 한다. 제주에 가는 영등할망의 바람주머니에 바람의 씨앗과 함께 오곡의 씨앗과 꽃씨, 해초씨도 함께 담아 준다.
영등할망
음력 2월 1일 제주도에 영등나라의 바람(꽃샘추위)을 몰고 들어오는데, 할망이 봄을 만들기 위해 뿌려대는 바람은 1만 8천종으로 영등할망의 변덕스러운 성격을 대변한다고 한다. 그래도 2월 15일경 동쪽의 우도 부근으로 제주를 떠날 때는 다행히도 이 바람을 모두 거둬 나간다. 이 때문에 옛 제주 사람들은 매서운 바람이 부는 음력 2월을 영등달이라 부르고, 영등할망이 들어오는 입구인 귀덕의 복덕개를 영등올레(영등길)라고 불렀다. 그리고 영등할망이 이렇게 사납고 변덕스러운 바람과 함께 땅에는 오곡의 씨를 바다에는 해초의 씨를 뿌리고 가야 진짜 봄이 온다고 믿었다. 이 기간에 영등할망을 환영하기 위해 제주 전역에 열리는 영등굿은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 유산에 등재되기도 하였다.
영등대왕
세상의 북쪽 끝에 있는 영등나라를 지키는 신. 북쪽의 외로운 하나의 별로 영등할망이 제주의 봄을 준비하는 동안 홀로 영등나라에 남아 차가운 서북풍과 얼음 산들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영등바람은 실제로는 북쪽 끝이 아니라 시베리아에서 불어 온다. 그리고 대왕을 북쪽의 하나의 별이라고 하는데, 북극성을 의미하는 건가 추측해 본다.)
귀덕마을은 영등할망이 가장 처음 발을 딛는 곳이다보니 이를 기념하기 위해 해변을 주욱 따라서 영등할망과 그녀를 수행하여 함께 들어오는 여러 신들(영등별감, 영등호장, 영등할망의 딸, 영등할망의 며느리 등등)이 푸른 바다를 등지고 서 있는 신화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소소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 공원은 귀덕 1리 포구에서 해변을 따라 약 1km가량 이어지는데, 바닷가의 현무암으로 된 좁은 돌길이 섞여 있어 차나 자전거로는 모든 구간을 구경할 수 없다. 석상을 하나하나 따라가며 그 옆에 적힌 설명을 깃들여 제주 신화를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고, 평평해서 걷기도 쉬운 길이니 햇살 좋은 날 느긋하게 도보로 구경하는 것이 이 길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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