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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 대한민국 볼거리 먹거리/Gangwon | 강원도
조금은 슬픈 이야기, 영월 장릉
2013. 3. 27. 20:55

조금은 슬픈 이야기, 영월 장릉

 

원주에서 태백으로 가는 길에 영월을 거처가는데, 이곳에 장릉이 있다.

오늘 아침 한글로 된 팸투어 스케줄을 받아든 오이군이 떠듬 떠듬 읽어서 조심스레 물었다.

 

오이  감자, 장릉이 뭐야?

감자  음...글쎄. 릉으로 끝나니까 왕릉인것 같은데...사실 나도 잘 몰라. ^^;

 

무식이 배째라며 튕겨나왔다.  머쓱해져서 급히 검색을 해 본결과 (땡큐, 스맛폰!) 이곳은 다름아닌 단종의 능, 바로 숙부에게 죽임을 당한 비운의 왕이 잠들어 계신 곳이다. 대부분의 조선 왕릉이 경기, 서울근교에 밀집되어 있는데, 장릉은 유일하게 강원도에 있는 조선시대 왕릉이다.

 

 

단종의 묘는 나즈막한 양지바른 언덕위에 있다. 묘소로 올라가는 길에 나무가 많음에도 환하고 밝은 기운을 느낄 수 있을만큼 햇빛이 잘 든다.

 

17의 나이에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은 죽은 후에도 그 시신을 매장하는 것을 금지시켜 한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보다못한 영월군의 호장 엄흥도가 그의 시신을 지게에 지고 묻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때는 겨울이어서 눈보라가 치고 있었는데, 산 위 양지바른 곳에 사슴한마리가 앉아있었다. 지게를 지고 올라오는 엄흥도를 보고 사슴이 놀라 달아나자 그 자리에만 눈이 녹아 있었고, 엄흥도는 그 자리를 파서 단종을 매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금지된 일을 한 것이므로 봉분을 세울 수가 없었고, 오랫동안 사람들은 쉬쉬하며 비밀 무덤을 지켜오다가 59년만에 중종의 허락하에 봉분을 갖출 수 있었다고 한다.

 

 

참...슬픈 이야기이다. 지금같으면 한참 꿈많을 나이 17살에 이미 부모님 다 잃고, 갖은 슬픈일을 격다가 결국은 가족의 손에 죽임을 당하다니. 그걸도 끝이아니라 죽어서 까지 시신조차 매장할 수 없는 운명. 어릴적에 매우 총명하여 조부인 세종으로 부터 많은 칭찬을 받으며 자랐다는데, 그냥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 행복한 삶을 살 수 도 있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왕과 왕비같이 살고 싶다 말하는 사람들은 그게 그렇게 행복한 위치만은 아닌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그 증거로 왕들이 돌아가신 평균 나이가 40대라니 말 다 했지 않는가.

 

 

 

 

 

어린나이에 세상을 떠난 단종이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는 무속신앙으로 스며들어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산위로 올라가는 길목에 누군가 쌓아놓은 돌탑.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왕릉으로 가는 길에 소원을 비는 대신 철딱서니 없이 셀카질을 했다.

새로 장만한 NEX 5R 의 기능 중 자동 피부 뽀샵질이 있는데, 아주 훌륭하게 작동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구입해서 외국인 얼굴은 못알아보는지, 오이군의 얼굴은 얼굴로 인식을 못했다. ^^;

 

 

장릉이 저어만치 보인다. 그 위치에서 내려다 본 낮은 산들로 둘러 쌓인 영혼을 위로하는 집, 정자각. 아름답고 평화로와 보이기만 하던 이곳이 단종의 이야기를 듣고나니, 바람에 나붓끼는 소나무가지 끝마저도 조용히 흐느꼈을 어린 단종의 어깨같이 느껴져 슬퍼보였다. 

 

 

59년 후 숙종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봉분갖추게 된 단종의 묘는 그 후 선조에 의해 상석, 표석, 장명등, 망주석 등을 갖추게 되었다. 일반 왕의 묘는 원래 동물들이 모두 이것의 두배로 있어야 하지만 선조의 명에 의해 절반의 숫자만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죽은 사람에게 이런 돌말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말이 둘이든 넷이든  이미 오래전 그의 영혼은 세상의 슬픈 것들에서 멀어져 저 어느곳에선가 자유롭고 평화롭게 날고 있으리라.  

 

 

단종의 영혼을 모시는 정자각과 그 건물 뒤 단종의 묘로 이어지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에 계단은 하나뿐. 이길은 사람을 위한 길이 아니라 묘에서 단종이 사당으로 내려오는 길, 즉 영혼의 길이다. 따라서 한걸음 한걸음 걷지 않아도 되는 영혼에게는 계단은 필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당의 기둥 아랫쪽 흰색은 구름을 상징하는데, 이는 이 집이 하늘위의 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즉, 영혼을 모시는 집은 항상 기둥아래가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반대로 서당이나 학문에 관련된 건물의 기둥은 윗쪽이 흰색인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하늘의 기운을 받으라는 의미라고 한다.  

 

 

홍살문. 옛 사람들은 붉은 색이 악의 기운을 물리친다고 믿었다. 따라서 왕묘에는 그의 위엄을 기리고, 나쁜 기운이 들지 않도록 이렇게 붉은 색의 문을 세워 두었다고 한다. 그 문 뒤로 나있는 길은 신도라고 하여, 왕이 다니는 길이므로 일반인들이 걷는것을 삼가해야 한다.  

 

 

그 홍살문을 쭈욱 따라가면 영천이라불리는 우물이 하나 있는데, 이 물은 한식때 단종과 그의 충신들을 위한 제를 지낼 때 쓰였다고 한다. 이 우물을 판 것은 단종을 지지하다 삼족이 멸을 당한 사육신중 박팽년의 후손이 만들었는데, 그 이야기가 또 드라마틱하다.

 

원래 삼족을 멸할때는 진짜로 남녀노소 즉, 어린 아이까지 포함하여 삼대를 완전히 몰살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를 배고 있던 여인을 차마 죽일 수가 없었던 왕은 명령을 내린다. 그 여인이 낳는 아이가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노비로 삼으라고. 그때 마침 그 여인의 노비가 임신을 하고 있었는데, 낳아보니 여인의 아이는 아들이고, 노비의 아이는 딸이었다. 그래서 둘은 아이를 바꿔치기한다. 노비의 아들이 된 여인의 아들도 노비로 살아 남고, 여인의 딸이 된 노비의 딸은 다시 노비가되어 살아남은 것이다. 이렇게 죽음을 피해간 사육신의 유일한 후손인 박기정이 1791년에 어명으로 우물을 파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자 오이군은  '옛 동양인들은 다들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았는 줄 알았는데, 그런 피비린내나는 드라마같은 역사가 있구나. 그런건 유럽왕족들이나 하는건줄 알았어. '  라고 한다. 씁쓸하지만 권력이 있는 곳에는 항상 슬픈 이야기가 따라다닌다. 동양이라고 예외일 수 있겠는가. 

 

 

 

 

 

이곳에는 소나무가 많이 있는데, 그 중 한 나무는 단종의 아내였던 정순왕후의 묘 주변에 있던 소나무와 한그루씩 바꿔 심은 것이다. 함께 할 수 없었던 부부를 다른 세상에서라도 함께하라는 의미에서라고 한다. 정순왕후는 15살에 왕비가 되어 18살에 단종과 이별한 후 평생을 혼자 살아야 했던 비운의 왕비로 그 묘는 사릉이라 하여 남양주시에 있다. 이 역시 단종의 묘처럼 다른 왕비의 묘와는 다르게 간소하다고 한다.

 

 

벌써 봄이 오고 있나? 오늘은 날씨가 참 따뜻하다. 이곳에 깃든 이야기처럼 차갑던 겨울이 저만치 물러가는지 여기저기에서 눈 녹는 소리가 즐겁게 들려온다.  따뜻한 햇살이 지붕을 감쌌고, 이렇게 처마끝에서 부터 봄이 오고 있었다.

제발 이대로 봄이 계속 다가오길...추운것 질색 하는 감자양은 조심스레 빌어본다. 오이군에게도 살짝 얘기했으나 아직 스키장 가야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때 1월 마지막 날이었다.) 맘대로 할 수 없는 날씨를 갖고 겨울을 보내네 마네 티격태격.

 

 

이것은 단종의 묘자리를 찾아내었다는 박충원의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낙촌기적비'. 문안에 또 문이있다. 1974년 박충원의 후손들이 세운것으로 비문 내용이 전래동화같이 재미있다.

 

단종의 시신을 몰래 매장한 엄흥도가 죽고나자 그 묘자리를 알길이 없었다. 그 후 이곳에 부임한 군수가 7명이나 원인을 알 수 없게 죽어갔는데, 그 후임으로 박충원이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어느 날 밤 비몽사몽간에 어떤 세사람에게 숲속 어디론가 끌려갔는데, 그곳에서 어린 왕을 신하 여섯명이 모시고 있었고, 왕은 박충원을 처형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신하중 한명이 그를 살려달라 부탁하여 살아돌아와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는 이것이 단종과 연관있음을 깨닫고, 엄흥도의 후손을 앞세워 단종의 묘를 찾아냈다. 그 후에 부임한 군수가 죽는 일은 더이상 없었다고 한다.

 

 

 

장릉을 지키는 참봉 한 사람과 수호군이 기거하였다는 재실의 창고에 있던 자물쇠이다. 옛날 곡식창고의 자물쇠는 물고기가 많이 쓰였는데, 그 이유는 물에사는 물고기이니 식량창고에 화재가 나지말도록 지켜달라는 의미에서고, 또 물고기는 알을 매우 많이 낳는 생물이니 재물의 번성과 다산을 기원하는 뜻이었다고 한다. 작은 물건하나에도 여러가지 의미를 담아표현하는 옛사람들의 재치가 인상적이다. 

 

감자와 오이는 이곳을 '다시 오고 싶은 곳'목록에 살포시 집어 넣었다. 장소가 매우 평화롭고, 한적하며, 겨울인데도 따뜻하게 느껴질 만큼 양지바라서 산책하기에 최적이다. 장릉만 휙 보고 지나가기에는 좀 아쉬운 듯 하고, 반나절정도로 여유롭게 와서 주변 마을도 둘러보고, 근처에서 식사도 하며 힐링여행같은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장릉은 그 이야기가 애처롭고, 거기에 얽힌 이야기가 요즘 유행하는 사극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아서,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과 함께 동행하면 좋을것 같다.

 

 

 

취재지원
이 포스팅은 하나투어, 겟어바웃 트래블 웹진, 강원도청에서 여행경비(숙박비, 교통비, 식비)를 지원받아 블로거 본인이 여행한 후 작성되었습니다.

여행날짜
2013.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