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없는 떠돌이 커플, 토종감자 수입오이의 여행 하이라이트 세번째 글입니다. 태평양 섬나라 한달살기 (바누아투, 피지, 사모아, 뉴질랜드, 타히티, 이스터) 내용을 못보셨다면 여기를 클릭해 주세요.
14. 미국 로스 앤젤레스 5주 : 우리동네 터미네이터
미국은 애초에 들어올 생각이 없었다.
원래는 아일랜드 호핑투어 컨셉에 맞게 아메리카에서는 바하마, 쿠바, 갈라파고스에서 각 한달씩 보낼 예정이었는데, 오이군이 인터넷 잘 안되는 섬생활에 질린 모양이다. 밥줄 끊긴다고 하도 협박해서 그럼 이번에는 쿠바를 빼고, 바하마랑 갈라파고스는 각 열흘씩 휴가로 가는 대신 남는 기간에 인터넷이 잘 되리라 믿었던(그땐 그랬지…) 미국에서 차분히 일을 좀 하기로 했다. 사실 나는 쿠바가 제일 가고 싶었지만 나의 어릴적 부터 드림 데스티네이션이었던 중남미는 스페인어를 좀 배운 뒤에 여행하기로 하고, 뜬금없이 빈 기간에는 로스 엔젤레스를 끼워넣게 되었다.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오이군이랑 ‘미국은 관심 없어. 정신없는 대도시는 싫어.’ 이러면서 왔는데, 막상 오니 여기 왜케 잼나? 달리 재밌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상당한 영화광인데, 어딜가도 영화속에서 본 풍경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래. 헐리웃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미국이 싫네 어쩠네 했던게 어불성설이다.
특히 아놀드 슈왈츠네거의 광팬인 우리 오이군은 그의 발자취를 밟는다며 행복해 했고, 나는 휴 잭맨과 같은 헬스클럽에 다니다가 목욕탕에서 나체로 마주쳤다는 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행복했다. (…음?)
헐리웃 근처에 사는 그 지인은 길을 지나가다 차에 치일 뻔 했는데, 그 차를 운전하던 사람이 브레드 피트였고, 해변을 걷다가 지갑을 떨어뜨렸는데, 그걸 주워준 사람이 아놀드 슈왈츠네거였으며, 헬스클럽에서 누군가와 어깨를 부딛혀서 서로 미안하다 하면서 보니 그게 크리스 프랫(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주인공, 스타로드)이었다고 한다. 헐리웃에 살면 이런 수퍼스타들이 모두 우리의 이웃이다. ^^;
그리고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이 참 신기하다. 은퇴하기 전까지 디즈니사의 총괄 아트 디렉터셨던 그 지인은 대학생때 오이군네 집에서 프랑스어 어학연수를 하던 하숙생이었는데, 30여년이 지난 지금 반대로 우리가 그의 집에서 며칠 신세를 지며 월드 스타들과 잠시나마 이웃으로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3년동안 끝나지 않는 수능 시험 같았던 이 책이 출간되었다. 캘리포니아 답지 않게 이상하게 모기가 극성이었던 2019년 7월 26일. 내게는 두번 째 생일 같았던 날이다. 책 자체가 나와서 좋은 것 보다 너무나 오랜만에 발뻗고 자거나 암생각 없이 신나게 놀 수 있다는 것이 나를 기쁘게 했다.
15. 미국 죠슈아 트리 10일 : 취향저격 황무지 살이
로스 엔젤레스에서 대도시의 활기를(정신 사나움을) 흠뻑 즐기고 이번엔 깡촌 시골로 왔다.
바로 죠슈아 트리 국립공원 입구에 있는 초미니 마을 죠슈아 트리가 그 주인공.
와우~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서부영화의 서부가 바로 이쪽이었구나. 미국의 서쪽이라서 서부영화였을텐데, 그동안 아무 생각없이 영화 장르로만 생각했다. 집 앞에서 황야의 무법자가 말을 타고 달릴 것 같은 분위기가 그대로 취향저격!
때는 여름으로 한낮 기온이 42도 정도가 기본이었으나 워낙 건조해서 밖에서도 그늘에 있으면 뭐 그럭저럭 살만했다. 그래도 사막에서 탈수로 쓰러질까봐 아침과 저녁으로만 국립공원 산책을 하고, 낮시간엔 에어콘 빵빵한 집에 콕 박혀 있었다는 ^^; 그야말로 오이군 소망대로 차분히 일만 할 수 있었던 곳.
그리고 이곳에서 대망의(?) 생일도 맞이 했다.
스위스에서는 뒷자리 숫자가 0이 되는 생일(10살, 20살…)은 큰 파티를 하는데, 올해 나의 뒷자리가 0이 되었던 것. 0이 들어가는 생일에는 선물도 크게 받는데, 몇 해 전부터 나의 선물은 ‘바하마의 바닷가에 사는 귀요미 돼지들과 인증사진’으로 정해져 있었다. 생일날 아침 깜찍한 아기돼지를 푸짐하게 끌어 안고 찬란한 열대 바다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나의 소원이었기 때문. 그러나 이때 바하마가 우리의 이동경로랑 도무지 일정이 맞지를 않더라. 아쉬웠지만 결국 기념 여행은 조금 뒤로 미루기로 하고, 생일 당일은 소박하게 우리둘만의 파뤼를 하기로.
그렇게 나는 사막 한가운데서 오이군의 시그니처 요리, 라자냐를 퍼먹으며 아름다운 꽃중년(젠장…ㅠ_ㅠ)의 서막을 올렸다.
그나저나 시골에 오니 집값도 저렴하고, 크기와 시설도 좋다. 마을은 미니 사이즈였지만 근처에 커다란 월마트와 카페, 레스토랑, 카우보이 펍도 있었으며, 기괴한 죠슈아 트리가 드문드문 자라는 황무지가 집에서 3분 거리. 이국적인 풍경에 홀딱 반한 나는 여기서 더 길게 머물고 싶었는데, 건조한 지역을 좋아하지 않는 오이군은 스위스의 촉촉한 초록 들판이 그립다며 내내 향수병 모드였다.
16. 미국 라스 베가스 3주 : 한방이 있는 인생
죠슈아 트리 다음에는 인생의 한방을 노리면서 라스 베가스로 날아왔다. 그러나 나는 이런 종류의 운이 별로 별로 없는 모양이다. 한국에서도 천원짜리 복권의 최하위 등수도 당첨되는 일이 거의 없는데, 여기서도 나의 운은 별다를 바 없었다. 디지털 노마드에서 그냥 노마드로 전환하는가 해서 은근 기대했는데… ^^;;
대신 정말 삐까뻔쩍 비현실적인 풍경덕에 꽤나 흥미로운 3주를 보냈다. 이곳을 다들 고담 씨티, 씬씨티라고들 부르기에 분위기가 퇴폐적이기만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가족적인 면도 많고, 은근 재밌더라. 모든 조명, 장식들이 과하게 화려해서 어안이 벙벙해지는 재미? 밤이면 길에 섹시한 복장으로 사진찍고 돈받는 남녀가 등장해서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 첨엔 사실 쳐다보기 민망해서 뭐야 싶었는데, 가만히 보니 그들과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이 기념사진도 찍고, 그냥 하나의 문화이자 ‘라스 베가스 스타일’로 인정하는 듯 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롯데월드 로티 로미의 성인버전 같은 존재. 그래도 웃겼던게 가슴과 엉덩이가 훤히 다보이는 비키니 복장의 언니들이 깃털을 흔들며 나긋나긋 지나가자 너댓살 정도 밖에 안되보이는 여자아이가 요정 팅커벨이라며 자기도 저 옷 사달라고 하더라…^^; 내 아이였다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난감했을 듯.
카지노 리조트가 많다보니 자연스럽게 다양한 공연도 많다.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예전에 캐나다에서 아쉽게 놓쳤던 태양의 써커스. 이곳에는 5-6개의 태양의 써커스 상설 공연이 매일 열린다. 그리고 평소 궁금했던 블루맨 쇼도 있더라. 대부분 롱런하는 상설 공연이라 가격도 내한 공연에 비해 저렴한 편(…이지만 그래도비쌈)
진짜로 저렴했던 건 골드클래스 극장인데, 다리 완전히 쭉 뻗고 누워서 볼 수있는 사운드 진동의자 영화관이 프로모션 기간이라며 인당 6달러(약 6천 5백원)밖에 안하는게 아닌가. 사운드 빵빵하고, 쿠션좋고. 팝콘 파는 곳에서 칵테일까지 팔아서 칵테일을 홀짝이며 왕같이 문화생활을 누렸다. 근데, 누가 베가스까지 와서 영화를 본다고 이렇게 극장이 좋은 걸까? 관람객이 우리랑 어떤 혼자 온 여자 한 명 밖에 없던데…
그리고 이곳에서 오이군의 생일 파티도 했다. 열살만 어렸어도 파티의 도시에서 물만난 고기처럼 제대로 파티를 즐겼겠지만 이제는 우리도 꽃중년에 입성하고 있는 중이므로…예행 연습차 조신하게(?) 보내기로 했다. 그러니까 우아하게 고급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공연 두 개를 봤으며, 카지노에서 할 줄 모르는 게임을 붙잡고 몇 푼 탕진한 후 헬리콥터를 타고 야경을 구경했다. 캬캬. 돈쓰고 노니 재밌긴 하더라. 한 달치 식비를 하루에 날려서 내일부터 당장 밥에 간장 찍어 먹어야 하겠지만 일단 생일날은 내일은 밥 안먹을 사람처럼 즐겨주는게 나이에 대한 도리!
17. 미국 그랜드 써클 6일 : 미국의 자존심
짜잔! 미서부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당연히 그랜드 캐년 아니겠는가. 그랜드 캐년을 비롯해 인근에 각종 멋드러진 장소들(아치스 국립공원, 모뉴먼트 벨리, 앤털롭 캐년, 브라이스 캐년, 자이언 국립공원 등등)이 많이 있는데, 그걸 모두 거치며 크게 한바퀴 도는 여행을 그랜드 써클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인생에 한번쯤 봐야할 풍경 1위라며 하도 광고를 하길래 돈 많은 미쿡의 대형 광고중 하나겠지 했는데, 흠…1위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으나 진짜 멋지긴 멋지더라. 그간 관심 밖이었던 미국의 대자연에 미안한 생각이 들정도.
때가 한여름이라 이글이글 끓는 미쿡의 황무지에서 캠핑을 할 엄두가 안나길래 호주, 뉴질랜드에서와는 달리 캠핑카가 아닌 일반차로 이동하며 작은 호텔이나 롯지에서 잤는데, 다음에는 조금 더 길게 일정을 잡고, 꼭 캠핑카로 횡단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쿡 안온다더니 다음에 올계획을 세우고 있다니…그만큼 멋진 미쿡의 황무지. 죠슈아 트리 국립공원에서도 그랬듯이 황량하고, 메마른 듯한 풍경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이 집중사격 당했다. 근데, 오이군은 멋지긴 한데, 뭐 그렇게까지 감동적이지는 않다며 자기는 춥고, 촉촉한 북유럽에 가고 싶다고…
일정 상 아치스 국립공원까지는 못 올라가고 자이언, 브라이스, 앤털롭, 모뉴먼트, 그랜드 캐년까지 돌았는데, 많은 이들이 미리 귀뜸 해 준 것 처럼 우리도 자이언 캐년이랑 브라이스 캐년이 가장 감동적이었다. 다 볼 시간이 부족하다면 두 곳을 중심으로 추천. 그랜드 캐년은 기대를 많이 했다가 실망하는 사람이 많댔는데, 나는 그 웅장함과 뭔가 모를 평화로움이 좋더라. 워낙 규모가 거대해서 그냥 앉아 한없이 바라 보다 보면 마음이 넓어 질 것 같은 그런 매력?
어쨌든 명불허전 그랜드 써클. 인생 여행지 중 하나로 인정. 땅땅땅.
18. 바하마 9일 : 왕언니의 생일 여행
나는 어릴 때부터 돼지를 좋아했다. (음…미안하지만 먹는 것도 좋아하고, 보는 것도 좋아한다) 모든 동물을 좋아하지만 특히 아기 돼지가 제일 귀엽게 느껴진다. 마당 있는 집이 생기면 개, 고양이와 함께 미니 돼지도 키우는 것이 나의 소망. 그리고 바하마가 나의 여행 위시 리스트 1위에 자리 잡게 된 이유는 바로 이 돼지 때문이었다.
오래전 어느날 맑은 시냇물 아래 갈색 미니 돼지들이 수영을 해서 다니는 꿈을 꾼 적이 있다. 소형견 정도의 작은 돼지들이 짧은 다리를 쭉쭉 뻗어 물속에서 잠영를 하고, 호기심 가득한 귀여운 눈을 깜빡이며 우리를 쳐다보는데, 세상에 이렇게 귀여울 수가! 오이군이랑 징검다리를 건너다말고 깜짝놀라 ‘아아, 이게 물돼지구나~’ 소리치며 물속에 손을 쑤욱 넣었다. 그러자 돼지 한마리가 수면으로 올라와 내 손바닥을 핥고 내려가는게 아닌가! 어찌나 귀엽고 신기하던지 돼지들 수영하는 모습과 맑은 시냇물이 아침에 일어났는데도 직접 본 것 처럼 눈앞에 아른아른하더라. 그래서 오이군에게 신나게 재잘재잘 이야기를…한게 아니라 일단 수퍼로 달려가서 유로 밀리언(스위스에서 파는 복권)을 샀다 ^^; 미리 말하면 복 달아 난다길래…
두근두근하며 당첨 발표를 기다렸지만 역시나 나는 그런 운은 없나보다. 돼지들과 맑은 물 즉, 복이 컨테이너 박스로 쏟아진다는 두 요소가 콤보로 나왔음에도 최하위 등수 하나 당첨되지 않더라. 초큼 기대했던지라 많이 아쉬웠지만 꿈일지언정 그런 멋진 풍경을 봤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그제서야 오이군에게 꿈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런데, 몇 년 전 인터넷을 보다가 머리를 한대 얻어 맞은 듯 놀라운 영상을 봐 버렸다. 청순한 흰모래 열대바다에 핑크빛 미니 돼지들이 신나게 수영을 하고 있는 영상!
❝뭐…뭐지? 딱 그때 그 풍경!❞
사실 내 꿈은 잔디밭 가운데 있는 계곡 같은 시내였고, 돼지도 갈색이었으며, 돼지들이 물고기 처럼 물 아래 살았지만, 어쨌든 맑은 물에 돼지들이 수영하는 모습을 보니 그 꿈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날부터 이 돼지들이 사는 바하마의 섬이 나의 여행 버킷 리스트 1위에 자리 잡게 되었다.
돼지들은 원래 주민들이 키우던 애들 몇 마리가 도망나와서 야생이 된 것으로 워낙 작은 섬이다보니 돼지들이 자연스럽게 바다에서 수영하는 법을 터득했다고 한다. 지금은 이 때문에 관광객이 몰려오기 시작해서 더 이상 야생이라기 보다는 바하마에서 가장 보호받는 존재가 되었다. 그림같은 해변에 포근한 보금자리도 마련해 줬고,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먹이 이외에도 건강식 사료를 주며 관리한다고. 덕분에 얘들은 해변에서 먹고, 자고, 수영하고. 돼지팔자 상팔자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런데 마침 우리가 가기 딱 일주일 전에 바하마 역사상 가장 큰 태풍이 치고 지나가서 윗동네 섬이 난리가 나버렸다. 그렇다고 취소를 하기엔 여행이 일주일도 안남아서 비행기 및 리조트 환불도 못받는 상황. 몇년을 기대하던 여행인데…엉엉, 이런 젠장! 엄청 갈등하다가 그냥 밀어 붙이기로 했다. 태풍으로 초토화 된 곳은 북쪽에 있는 그랜드 바하마 Grand Bahama 섬인데, 우리가 가는 엑수마 Exuma 섬은 훨씬 남쪽에 있어서 피해가 전혀 없다고 하길래…
태풍이 나자 전 세계 사람들이 제일 먼저 안위를 물어 본건 어이없게도 돼지였다고 한다. 뭔가 슬프고 남들은 다 죽어 간다는데, 내가 여길 가서 놀아도 되는건가 하는 죄책감이 들어 다시 취소를 두고 갈등하고 있는데, 바하마에서 관광객들 제발 취소 하지 말라고, 그랜드 바하마를 제외하고 다른 섬은 다 멀쩡하니 제발 와달라고 하는 캠페인을 하기 시작하더라. 복구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어서 그나마 관광객도 다 취소하면 복구할 돈도 없다고. 그래서 여전히 오락가락한 날씨가 걱정이었지만 기대반 걱정반으로 바하마로 출발했다.
그리고는 짜잔~
첫날 짙게 깔린 구름 때문에 비행기가 엑수마 섬에 착륙을 못하고 수도인 나싸우로 회항하는 바람에 하루를 다 까먹은 것 말고는 너무나 완벽한 휴가였다. 화창한 날씨며, 그림같은 풍경, 고급진 리조트 그리고 기대하고 기대하던 깜찍이 돼지들에 덤으로 이구아나들과 친근한 가오리까지!
올인클루시브 리조트에서 돼지보다 더 돼지같이 먹고, 수영하는 돼지들을 보며 나의 또다른 10년을 맞이 했다. 너무 시작부터 돼지가 난무해서 앞으로의 내 몸매가 걱정이지만 이만하면 스릴 넘쳤던 서막과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지은 완벽한 생일 여행이라 할 수 있겠다.
19. 미국 마이애미 2주 : 씨유 레이터 엘리게이터~
또다시 미쿡.
미쿡 안간다더니 또 들어왔네.
바하마 다음 여행지는 갈라파고스였는데, 바로 가는 것이 없었고, 가격을 따져보니 플로리다로 들어왔다 나가는 것이 가장 싸길래 동선의 효율보다는 가격의 노예가 되어 또다시 미쿡땅을 밟게 되었다. 그래도 이 나라가 워낙 크다보니 올때마다 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오렌지만 나오는 줄 알았지 뭐가 있는지 전혀 몰랐던 플로리다는 그간 머릿속에 떠오르던 미국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가지고 있었다. 강에는 악어들이 살았고, 도심의 숲에는 동물원에서 도망나왔다는 원숭이들이 야생이되어 무리지어 돌아다녔다. 집 앞 바닷가에는 돌고래와 매너티(바다소)가 수영을 했고, 정원을 걸을 때면 50센티는 훨씬 넘어보이는 초록 이구아나들이 화들짝 놀라 도망가는 모습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이렇게 얘기하면 남미 정글 어딘가 같은데, 이곳은 분명 미쿡이고, 이 모든 것들이 도심과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놀라웠던 건 도시가 매우 고급스럽고 화려했다는 것과 주민들이 대부분 남미 히스패닉 계열이라는 것. 미국인데, 영어보다는 스페인어가 훨씬 많이 들려왔으며 우버 드라이버들이 영어를 거의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남미에서 올라온 이주민들이 많다고 하면 도시가 히피스럽거나 할렘 같지 않을까 할텐데, 저언혀 그렇지 않고 엄청나게 깨끗하고 삐까뻔쩍 하더라. 여의도 금융빌딩들을 두세배로 키워 놓은 것 같은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고층 빌딩들이 해변을 따라 수십킬로씩 쭈욱 늘어서서 광채를 뿌렸고, 수로를 둘러싸고 궁전같은 대저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게다가 LA에 그렇게 많던 홈리스들도 이곳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바닷가에서 먼 곳은 조금 할렘 같은 곳도 있다는데, 마이애미부터 헐리우드를 거쳐 포트 라우더대일 해변쪽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라 돌아다닐 때 LA보다마음이 훨씬 편했다는.
이렇게 도시는 예술적인 곳도 있고, 음식도 다양하며, 자연과 잘 결합된 모습이 전반적으로 마음에 들었는데, 아쉽게도 마이애미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순탄하지는 못했다. 우리의 다 쓰러져가는 에어비앤비 숙소가 즐거운 여행을 방해하는 복병이었던 것. 우리는 4년째 에어비앤비 장기렌트를 이용해서 살고 있는데, 대부분 수퍼호스트가 운영하는 집을 고르면 문제가 없는 편이지만 아주 간혹 수퍼호스트일지라도 뭔가 숙소의 상황이 바뀌어서 이렇게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이 집은 건물이 다 쓰러져가는 옛날 호텔이었는데, 상가가 텅텅 비어 폐가 같이 생긴데다가 인터넷도 잘 안되고, 이웃들이 복도에서 대마초를 뻑뻑 피워대거나 싸웠으며 세탁기도 넘넘 더러워서 위치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조금 정상적인(?)집에 살며 마이애미부터 포트 라우더대일까지 천천히 둘러 보고 싶다. 그나저나 미쿡에 또 올 건가보다. 계속 다음에 오면…이라고 하는걸 보니…
20. 갈라파고스 섬 11일 : 왕옵빠의 다이빙 로망
두둥~올해의 마지막 여행지는 대망의 갈라파고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의 힌트를 얻었던 그 유명한 섬 말이다. 과학잡지에서나 보던건데, 이렇게 관광객이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일 줄이야!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곳이니 철저히 보호돼서 아무나 못 들어오게 하는 무인도일 거라 상상했건만 여기에도 마을이 있더라.
그러나 관광객이 쉽게 올 수 있긴 해도 모든 섬을 마구 돌아다닐 수 있는 건 아니다. 갈라파고스 제도는 총 19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세개의 섬에 마을이 있고, 나머지는 무인도로 정부인증 가이드와 동행해야만 출입이 가능했다. 그리고 사람이 사는 섬이라고 해도 아무데나 다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을과 몇몇 지정된 보행로나 해변에만 갈 수 있다. 따라서 각기 동식물이 다른 여러 섬들을 두루 구경하기 위해서는 며칠에 걸쳐 배에서 숙식을 하며 이섬 저섬을 도는 크루즈 여행이 가장 효율적이다. 크루즈는 항상 정부인증 가이드를 포함하고 있고, 짧게는 2시간 길게는 5-6시간 걸리는 섬간 이동을 밤에 하기 때문에 더 많은 섬을 볼 수 있다. 시설에 따라 약 100여종의 크루즈가 있는데, 백팩커를 위한 저렴한 보트부터 초호화 100인승 선박까지 시설과 가격대가 매우 다양하더라. 그 중 우리는 중급 크루즈를 이용해서 8일간 여러개의 섬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갈라파고스에 온 목적은 크루즈가 아니라 바로 스쿠버 다이빙!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신기한 동식물이 있는 갈라파고스는 물속 환경도 풍부하기로 유명한데, 다이빙을 좋아하는 오이군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한방에 넘어 갔던 것. 근데, 결국 나는 갈라파고스의 다이빙에 매우 실망하고 말았다. 워낙 소문이 자자해서 엄청난 수중환경을 기대했건만, 웬걸…늘 조류가 세다보니 시야도 안좋고, 물은 엄청 차가웠으며, 기대보다 물속에 뭐가 많이 없더라. 망치상어 몇 마리가 신기했던 것 말고는 뭔가 황량한 느낌 -_-; 입수 장소 파도는 또 어떻고. 약 2미터 정도 높이로 파도가 치는 곳이라 파도 포비아가 있는 나는 보는 순간 심장이 폭발하는 줄. 헐, 서핑도 아니고 다이빙을 이렇게 파도가 높은 곳에서…-_-;
망치상어 수백마리가 논다는 유명한 울프 & 다윈 포인트를 갔더라면 감동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는데, 워낙 멀다보니 파도가 높은 10월에는 8일짜리 리버보드를 타야 그곳에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다이빙 보트는 출도착을 제외하고는 육지에 상육할 수 없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8일동안 다이빙만 해야하는데, 그러면 비용도 일정도 상당히 초과할 뿐더러 8일동안 다이빙을 할 체력도 걱정이었다. 예전에 4박 5일 리버보드 타고도 체력이 바닥 나서 힘들던데 8일이나 계속 다이빙을? 자신이 없더라. 그래서 결국 섬에서 출발하는 세이무어와 고돈락 다이빙만 갔건만 음…글쎄…? 내 인생 다이빙은 여전히 뉴 칼레도니아인 걸로. 오이군은 구태여 다이빙을 위해 여기까지 다시 오지는 않겠지만 한번쯤 볼만한 것 같다고 한다.
그러나 갈라파고스의 육지 풍경은 가뿐하게 내 인생 최고의 여행지 리스트 상위에 올랐다. 신기한 새들과 이구아나, 거북이들이 온 섬을 뒤덮고 있었던 것! 동물을 좋아하는 우리에게는 정말 천혜의 여행지였다. 그리고 숙소의 인터넷도 생각보다 빨라서 마이애미 대신 여기서 한달살기를 할껄하는 후회가 남더라.
21. 스위스 뉴샤텔 6주 : 다시 처음으로. 한박자 쉬고 하낫, 둘, 셋…
오이군의 고향이자 우리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신혼을 보냈던 스위스의 작은 도시 뉴샤텔.
말이 도시지 시골 읍내 규모이건만 오이군은 악착같이 도시라고 부르는 스위스 서쪽의 온화한 도시(마을)다.
마음같아서는 갈라파고스 다음에 페루, 볼리비아, 멕시코, 벨리즈, 쿠바를 거쳐 버뮤다를 찍고, 유럽으로 들어 오면 딱 좋았겠으나 모든 것이 다 소원대로 되어 버리면 너무 재미 없지않겠는가. -_-; 연말에 큰 가족 행사가 있어서 스위스로 복귀해야 하는데, 도무지 일정이 맞지 않더라. 결국 나머지는 지구 한바퀴 2차 써클(?)에서 해결하기로하고 일단 스위스로 돌아왔다.
그래서 갈라파고스에서 단번에 유럽대륙으로 날아왔다. 말이 단번에지 사실은 오는데만 3일 걸렸다는. 비행기표 가장 저렴한 것을 물색하다보니 경로가 갈라파고스 – 과야킬 – 마이애미 – 오슬로 – 제네바 가 나왔던 것. 뭐 돈이 없는 대신 시간이 많았던 우리는 직항대신 미친듯이 이공항 저공항으로 메뚜기 뜀을 뛰며 겨우겨우 스위스로 들어올 수 있었다. 도착했는데, 으아…출발지와 스위스가 7시간의 시차도 있긴 하지만, 3일동안 장거리비행과 장시간 공항대기를 반복하며 잠을 제대로 못잤더니 스위스 오자마자 2박 3일 좀비 모드를 면할 수 없더라.
어쨌든 덕분에 올해는 오이군이 근 10년만에 가족과 함께 스위스 최대 명절인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늘 한국은 크리스마스 명절 분위기가 안나네 어쩌네 했었는데, 간만에 스위스에서 겨울을 보내니 오이군은 매일 콧노래가 절로 나는 모양. 사실 나는 스위스의 겨울을 좋아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장식이 매우 화려할 지언정 대도시들은 대부분 큰 호수를 끼고 있기 때문에 겨울이면 2-3개월간 안개가 끼거나 낮은 구름이 깔려 있어서 기분이 엄청 꿀꿀해지기 때문. 그런데 오이군은 늘 겨울안개가 그립다는 걸 보면 나고 자란 내 고향의 풍경은 뭐가 됐든지 그냥 그리운 건가보다. 가끔 내가 매케한 매연 냄새와 번쩍이는 네온사인 가득한 서울의 밤이 문득문득 그리운 것 처럼.
22. 스위스 로잔 한달 : 젊음의 열기
젊음의 도시 로잔!
보통 스위스에 오면 가족, 친구들 그리고 오이군 직장이 있는 뉴샤텔에서만 머무는데 올해는 로잔에서도 한달을 보내기로 했다. 뉴샤텔에서 기차로 약 40분 거리라 그리 멀지 않건만 분위기는 180도 바뀐다. 사계절 활기가 넘치고, 늘 파티 분위기인 로잔은 스위스 불어권 젊은 층이 선호하는 도시. 같은 불어권이지만 세계 명품 도시다보니 생활비도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제네바보다 저렴하고, 사계절 평화롭기만한 (그래서 휴가로는 좋은) 뉴샤텔과 달리 규모도 크다보니 활기가 넘치기 때문이다.
세계 각 문화권에서온 이주민들도 많아서 분위기도 다른 문화권에 더 많이 열려있는 편이다. 스위스는 중립국이라니 웬지 온순할 것 같지만 사실 전반적으로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편인데, 로잔은 다른 스위스지역들에 비해 더 개방적인 분위기. 게다가 나는 한국 식재료도 구할 수 있어서 좋더라. 일본상점과 중국상점에서 김치를 비롯한 각종 한국 식재료를 판매해서 한달내내 매일 한식 파티를 할 수 있었다. ^^; 심지어 스위스 주말 시장에 가니 한국인 와이프를 둔 스위스 아저씨가 길에서 김치 및 각종 반찬도 팔고 있더란. (스위스에서는 취리히를 제외하고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진짜 한국 식품점은 없다. 게다가 뉴샤텔에는 중국 상점에도 한국 식재료가 거의 없다.)
그리고 마태호른이 있는 발레주 알프스나 제네바, 몽트뢰에 가기도 좋은 불어권 교통의 허브이기도 하니 여러모로 불어권 베이스로 살기에는 최적의 도시인 듯하다. (단, 베른이나 취리히등 독어권까지 왕래가 잦다면 뉴샤텔 교통이 더 낫다)
더없이 로맨틱한 핑크빛 노을. 겨울에는 날이 맑으면 노을이 이렇게 핑크빛으로 생기더라. 소녀감성 풀장착. 물위와 배 돗대에 있는 검은 점은 전부 물닭.
이번 로잔살이로 오이군 친구들이 대부분 이근처로 이사 했음에도 고향 뉴샤텔을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 오이군의 관심을 조금 돌려 놓는데 성공한 듯하다. 예전 직장때문에 출퇴근 하던 곳임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는데, 살아보니 괜찮은 것 같다고.
❝만약 스위스로 돌아와 산다면, 여보님, 로잔 어때요? ^^❞
노년을 한국과 스위스에 왔다 갔다 하면서 사는 것이 목표인데, 그 나이에도 내가 이런 도시를 좋아할 지는 의문이지만 일단은 로잔에 사는 걸로 나혼자 결정 ^^;
2019년, 전세 빼고 떠돌기 시작한지도 어느덧 4년이 지났는데 기간에 비해 몇 곳 못갔다고 생각했 건만, 모아 놓으니 나름 우리 참 열심히 돌아다녔구나 싶네. 여전히 지도위엔 색칠하지 못한 흰 공간이 훠얼씬 많지만 우리에겐 또 내일이 있으니까!
오늘 못한 일은 내일로 힘차게 미루고 오늘밤은 일단 아이슬란드로 출바알! ㅋㅋ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Happy New Year, everyone!
다음편에서는 대망의 2020년 첫 여행지 아이슬란드부터 코로나 팬데믹으로 여행을 중단하기까지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하아~~~~~~~~~~~~~~~~~~~~~~~~~~~~~~~~~~~~~~~~~~~~~~~~
정말 오랜만에 눈이 번쩍 뜨여지는 훌륭한 블로그 발견했네요. 사진도 글도 너무 탁월하십니다. 자주 와서 정독하겠습니다.
앗, 감사합니다. 응원에 힘입어 열심히 써야겠네요. ^^
집콕중에 필살 업뎃 해야겠어요 ㅎㅎㅎ
오 너무 너무 멋져요…. 새로운 세상을 이렇게 만나보다니요
그리고 스위스는 정말 또 한 번 가보고 싶게 만드는 곳이 너무 많네요
그죠! 작지만 볼거리로 꽉꽉 찬 나라 스위스네요 ㅎㅎ
다음에 또 댕겨 오세요! 작은 소도시 중심으로 한번 여행해 보세요. 또다른 스위스를 만나실 거예요 ^^
여전히 잘 다니고 계시네요. 항상 건강 조심하세요.
감사합니다 🙂 계속 신나게 다니게 어서 코로나 잠잠해졌으면 좋겠어요 ㅠ ㅜ
레이캣님께도 또 멋진 한해되기를 바랍니다 ^^
너무하네용. 정말. 행복행복하게ㅇ~, 웃으면서 글과 사진을 보네용. 너무해요. 즐거운 비명. 너~~~ㅁㅜ 보기 좋아서 너무 좋네용!!!
예쁜 사진도, 인상적인 사진도, 느낌있는 사진도, 째미있는 사진도 모두 너무너무너무하게 좋은데,
센스있는 글까지. 너무하잖아요. 쨈나네 읽었어요. 부럽습니다!!!
구짱님!
잘 지내셨죠? 언제나 따뜻하게 반겨주셔서 넘 감사합니다. ^^ 2019년 목표가 포스팅 자주하기였는데, 또 이렇게 한해가 쑥 가버렸어요 ㅋㅋ 올해 목표로 재설정 ㅋㅋ
늦었지만 새해 복 드음~뿍 받으세요!
바하마라는 곳은 TV에서만 봤는데 넘 신기하니요. 생생한 여행기 넘 재밌게 봤습니다 ~~
재미있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바하마 저도 이야기만 들었지 제가 직접 가는 날이 올 줄은 몰랐네요 ㅎㅎ
왜 헐리웃 배우들이 그렇게 이동네 섬들을 사모으는지 이해가 가더라고요. 너무 예쁜 곳이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