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부터 프러포즈 그리고 우리의 연애시절…
어쩌다 보니 블로그 글 작성 순서가 역으로 가는 토감수오 러브스토리.
사실 우리의 연애시절과 첫만남 등은 쓸 생각이 없었는데, 얼마 전 인스타 ‘토감수오에게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이벤트를 진행한 결과 여러분이 궁금하시는 것 No.1이 바로 토감수오의 첫 만남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오홍… 몰랐었다. 내 인친님들은 전부 로맨틱하시구나. ^^;
영화를 봐도 공상과학영화 내지는 판타지, 스릴러, 호러 등만 보는 나인지라 사람들이 로맨스에 제일 관심이 있는 줄은 생각도 못했다. 이벤트를 진행할 때는 사실 디지털 노마드 라이프라든가 여행지 추천, 해외 한달살기 뭐 이런 것을 관심 있어하실 줄 알았는데, 첫 만남 이라니…^^;
토감수오 인스타 이벤트 당첨자 발표 영상
게다가 몇 달 전부터 블로그 유입 키워드에 자꾸 ‘감자 오이 20대’, ‘토감수오 20대 시절’이 찍히네? 헛… 이건 왜 인지 모르겠으나 지인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 TV조선에서 찍은 사랑은 아무나 하나 재방송이 여전히 가아끔 나간다고 한다. 아마 그 방송 보시고 생각나서 찾아보시는 걸까 싶은데, 20대를 콕 집어 검색하시는 정확한 이유는 잘 모름.
사실 옛날 연애시절 이야기하는 것도 쑥스럽고, 추억팔이 하자니 나이든거 같아 서러워서 우리의 첫 만남과 연애시절 등을 포스팅할 생각은 없었는데, 약속은 약속이니 철판 깔고 펼쳐 보기로. ^^;
오랜만이야, 내 미래 남편!
Long time no see, my future husband!
감자와 오이가 처음 만난 곳은 호주 였다.
그런데, 그의 첫인상은…
음… 조금 오묘했다고 해야 할까…?
내 나이 26. 당시 나는 대학 졸업 후 회사를 다니다가 이건 뭔가 아니다 싶어 때려치우고 호주 맨리 Manly 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있었다. 다니던 회사가 국내 탑 대기업 중 하나인 타이틀을 달고 있어서 부모님이 되게 아쉬워하셨지만 내 정신과 육체를 갉아먹는 그 생활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어서 내린 선택.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한 그게 내 인생에서 가장 잘 선택한 일이었다고 확신한다.
어쨌든 어학연수로 간 어학원 위치도 바닷가라 너무 좋았고, 첫날부터 학원가는 길을 잃는 바람에 레벨 테스트를 못 치러서 임의로 대충 넣어 준 반 선생님이 너무너무 좋았기 때문에 당시의 나는 하루하루 눈뜨는 것이 설레고 모든 것이 핑크빛인 상태였다. 그렇게 꿈같은 매일을 보내다 보니 영어실력도 금방 늘었고, 한 달 만에 레벨업을 하여 반이 바뀌게 되었는데, 이게 반이 바뀌니 선생님도 바뀌어서 조금 아쉽네… 새반 선생님도 좋긴 했는데, 첫 번째 반 선생님이 너무 임팩트 있게 상냥하고, 설명도 잘하고, 재밌고, 표정도 기분 좋고, 발음도 듣기 좋고, 모든 것이 완벽했기 때문.
이쯤 되면 내가 선생님을 좋아했나 하고 오해하실 수도 있는데, 그건 전혀 아니다. 선생님은 나보다 15~20살 정도 많은 듯했고, (나는 나이 차이 ± 2~3살 정도가 좋다) 무엇보다 그분은 게이셨기 때문에 여자에게 관심이 없으셨음. ^^; 그냥 순수 100% 인간적으로 그 선생님이 너무 좋았고, 그 반 분위기가 좋았을 뿐.
결국 나는 반이 바뀌고도 먼저 반을 잊지 못해 쉬는 시간이면 그 반 창문 앞에서 알짱거리고는 했다. 덕분에 우리 반 돌아가는 상황보다 이전 반 상황에 더욱 빠삭한 지경. 그반에 학생이 몇 명인지, 그반은 언제 파티를 하는지, 새로 온 학생은 누구인지 등등. 그반에 새로 온 학생들에게도 전부 먼저 가서 말을 걸고 친해졌기 때문에 몇몇 애들은 내가 자기네 반 학생인 줄 알았다고. ^^;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역시 쉬는 시간에 그 반 창문 앞을 지나며 흘깃흘깃 새로 온 학생 누가 있나 스토킹을 하고 있는데, 어라. 못 보던 키 큰애가 눈에 확 띄네?
어떤 남자애의 옆모습이었는데, 헐…
심쿵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얼핏 봤는데, 나도 모르게 ‘허겨~’ 하는 이상한 웃음이 나고 얼굴이 간질간질했다. 그리고 심쿵한 것과는 별개로 동시에 왠지 아는 사람 같은 느낌이? 내가 저렇게 생긴 외국인을 알고 있을 리 만무하건만 그 애를 보는 순간 뭔가 원래 알고 지내다가 엄청 오랜만에 만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너무 오랜만이라 얼굴이 변했는데, 어찌어찌 알아봐서 반가운 기분? 그냥 반했다기보다는 ‘알아봤다’라는 반가운 느낌이 더 강했던 오묘한 우리의 만남 나만의 스토킹.
결국 그날은 그 친구에게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보통은 새 학생이 보이면 그 반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바로 통성명하고 오늘부터 베프 모드인데, 그 애에게는 그 오묘한 기분 때문에 나도 모르게 한 박자 뜸을 들였다.
난 싹싹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 좋은데…
I like a polite and social person
그러나 나의 뜸 들임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날 학교 가려고 버스를 탔는데, 어제 봤던 그 애가 바로 내 옆에 뙇! 서있네? 헐. 이건 운명이다. 말 걸어야지.
다행히(?) 그날은 심쿵하는 그런 느낌이 없었기 때문에 평상시처럼 무난하고 상냥하게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
어? 너 XX선생님반에 새로 온 학생이지? 나도 예전에 그 반에 있었어. 지금은 옆반이고.
어…
반가워. 이름이 뭐니?
어…? 오이…
❞
보통 이렇게 물어보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너는?’ 하고 물어본다. 그럼 내 이름을 말해주고, 동시에 호주 스타일로 악수를 착~하면서 통성명이 끝나는데, 얘 뭐니… And you? 가 안 따라오네. 할 수 없지. 그럼 내가 그냥 말해주는 수밖에.
❝
어머. 너랑 너네 반 선생님이랑 이름이 같네? 선생님 너무 좋지? 내 이름은 감자야. ^^
아…
어느 나라에서 왔니?
스위스.
(역시 ‘너는?’이 없다. 그냥 내가 말해줘야지.) 아. 나는 한국 사람이야. 너 매일 이 버스 타고 오니?
응.
이 버스 타고 올 때 풍경 너무 예쁘지 않니? 계속 바다가 보여서 너무 좋아. 어디 살아??
XXX 살아.
그렇구나. 그 동네는 한번 가봤는데, 이쁘더라. 마음에 드니?
으응…
❞
하아… 뭐야 얘. 도무지 대화가 이어지질 않는다.
내가 싫은가? 그래도 보통 예의상 대답을 하고나면 관심없어도 질문을 하는데, 왜 이렇게 단답형이야. 난 싹싹한 사람이 좋은데, 뭔가 좀 쌩한 것이… 흠.
어제 봤던 설렘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어서 학교에 도착해서 이 어색한 침묵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아… 뭐야 얘. 도무지 대화가 이어지질 않는다.
내가 싫은가? 그래도 보통 예의상 대답을 하고나면 관심없어도 질문을 하는데, 왜 이렇게 단답형이야. 난 싹싹한 사람이 좋은데, 뭔가 좀 쌩한 것이… 흠.
어제 봤던 설렘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어서 학교에 도착해서 이 어색한 침묵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재패니즈 프린스
Japanese Prince
그렇게 몇 주가 지났다.
그 사이 나는 레스토랑 알바를 시작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고, 따라서 쉬는 시간에 남의 반을 스토킹 하는 대신 테라스에 널브러져 ‘쉬는’ 시간이 많아졌다. 주말 페이가 더 높기 때문에 주말에도 일을 해서 상대적으로 어학원 생활에 신경 쓸 여유가 적어졌으나 이곳에 온 본 목적은 알바가 아니라 영어이지 않던가! 피곤하지만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해 틈틈이 애들과 어울려 놀기도 해야 한다.
음…? 영어를 배우러 왔으면 노는 게 아니고 공부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겠지만 호주에 도착해서 한 달쯤 지나 깨달은 것은 학원에서 아무리 종이 갖고 씨름해 봐야 프리토킹이 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문법, 고급 단어를 엄청나게 많이 아는 한중일 학생들은 몇 달이 지나도 말을 버벅거리고 잘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근데, 문법 시험 보면 바닥을 절절 기는 유럽 애들은 이주만 지나면 금새 말만은 청산유수더란 말이지. 왜 그런가 가만히 봤더니 유럽애들은 짧은 단어로 용감하게 대화를 막날린다. 그러면 또 상대방은 그걸로 대략 어찌어찌 알아듣고 대답을 해주고, 그렇게 서로에게 새로운 단어와 부족한 표현력을 보충해주며 자연스럽게 말하기를 늘리더라. 근데. 학교에서는 이렇게 말할 기회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수업시간에는 대화보다는 주로 선생님이 설명을 하고, 쉬는 시간은 10분이라 화장실 갔다 오면 끝. 그럼 방과 후에 만나서 대화를 해야 하는데, 바로 이 대화의 장이 ‘파티’인 것이다. 따라서 도착하자마자 맨날 파티하고 놀러 다니기 바빴던 유럽 애들은 말이 팍팍 늘었던 거고, 반면 집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숙제하는 근면 성실한 동아시아 학생들은 말하기가 더딜 수밖에. (근데, 교육방식이 많이 바뀌여서 요즘 학생들은 다를 수 있다. 이건 나의 세대가 그랬다는 이야기.)
깨달은 건 바로 실천하라 했다.
겁나 열심히 공부했던 처음 2~3주는 한국에서 영어학원 다니는 것과 별다를 바 없었는데, 용기내서 이반 저반 파티는 물론 이나라 저나라 그룹 파티를 다 따라다니기 시작한 4~5주째 부터 내 스스로도 놀랄 만큼 말하기가 팍팍 늘었다. 처음엔 잘 모르는 친구들이 나의 짧은 영어를 못 알아들으면 어쩌나 쑥스러워 조심스러웠는데, 사실 그들도 짧은지라 눈치가 백단이더라. 단어 몇 개만 나열해도 그냥저냥 알아듣네? 그러다 보니 신기해서 용기가 생기고, 거기에 술 한두 잔 들어가면 뭐 기백이 장군 저리 가라, 그냥 폭풍수다지.
어쨌든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는데, 이렇게 몇 달이 지나고 나는 알바를 세 개나 뛰는 바람에 무지 바빴지만 여전히 파티뿐만 아니라 학교 이벤트나 학생들이 개별 소풍을 간다고 하면 잠을 줄여서라도 따라다녔다. 모든 반의 이벤트에 다 참석했기 때문에 학원의 거의 모든 학생들을 알고 있었고, 그들도 내가 부르면 다 간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벤트가 생기면 빼놓지 않고 연락을 줬다. 자기네 나라 애들만 모이는 자리라도 깍뚜기 처럼 항상 불러줘서 각국의 다양한 파티 문화도 접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키 큰 스위스 아이와 마주칠 기회도 많이 생겼다. 나보다 학원에 늦게 와서 한 번도 같은 반인 적은 없었는데, 항상 파티에서 마주치는 사이. 그래서 나 같은 파티족인가 싶었는데, 또 가보면 혼자 구석에서 이어폰 꽂고 고개를 까딱까딱하면서 음악을 듣지 사람들과 별로 말을 섞지 않는다. 뭐냐 쟤는…
가끔 친구들하고 있는걸 보기도 했는데, 그 친구들이 또 조금… 의외였다. 나이 어린 십 대 태국 남자애들이거나(학원에 십 대에 어학연수 온 애들이 섞여 있었다) 꺅꺅거리는 일본 여자애들이거나. 우리 학원에 일본 여자들은 크게 두 부류였는데, 키 작고 되게 꺅꺅거리며 ‘카와이~’남발하는 애들이랑 칼 좀 씹었을 것 같은 키 큰 쎈언니 타입인 애들이 있었다. 그중 나는 자연스럽게 키 큰 쎈언니들과 친해졌고, 이 친구는 항상 그 작고 꺅꺅 거리는 부류에 둘러 싸여 있었던 것. 근데, 몇몇 한국 여자들은 그 심하게 여성스러운 (카와이를 외칠 때 항상 손뼉을 치며 다리 한쪽을 뒤로 든다) 일본 여자애들의 리액션에 은근한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키 큰 스위스 아이도 ‘재패니즈 프린스’라고 부르며 미묘하게 디스 하는 애들이 생겼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더 있는데, 대부분의 바닷가 바비큐 파티의 선동자가 바로 그 키 큰 스위스 친구라고 했다. 우리는 인당 5달러씩을 걷어 싸구려 박스 와인과 1달러에 6개 들어있는 똥냄새나는 소세지를 잔뜩 사들고 쉘리비치에서 바비큐 파티를 많이 했는데, 대부분의 이 파티의 주최자가 바로 그 애였던 것.
‘헐… 근데, 왜 파티 주최자가 혼자 구석 가서 음악이나 듣고 있는담. 왕자병인 건가? 늬들이 내게 와서 말을 걸어~ 뭐 이런 거야? 보면 볼수록 이상한 애네…’
시간이 부린 마법
The magic of time
그러던 어느 날, 조금 의외의 사건이 생겼다.
역시 우리 반이 아니었던 어떤 체코 남자애와 내가 썸을 타게 된 것. 당시 파티에 빠지지 않고 출근(?)하고, 사교적인 성격이었던 내게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심지어는 알바하는 슈퍼마켓이나 음식점, 카페에서도 남정네들이 연락처를 묻거나 꽃다발 또는 선물을 건네주는 일이 많았는데 (모두들 내가 제일 잘 나갔다고 우겨대는 20대, 그때 그 시절), 모두 자연스럽게 튕겨 냈건만 이 애랑은 어쩌다 조금 진지하게 썸 모드에 돌입하게 되었다. 뭐 남들보다 진한 남색 눈이 특별하게 이뻤다나 뭐래나…^^;
그 체코애랑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 구도에 들어서서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좀 했는데, 어느 날 학교 파티에 같이 가다가 그 키 큰 스위스 아이와 불쑥 마주치게 됐다. 우리 바로 옆에서 슈퍼마켓 장본 것을 수레에 덜덜 끌며 걸어가고 있더라.
‘글고 보니 한동안 쟤를 못 봤네. 착해 보이는 건지 졸려 보이는 건지 모르겠는 풀린 눈, 빗은 건지 멋을 낸 건지 모르겠는 헝클어진 머리, 큰 키에 구부정하면서도 무지 빠르고 경쾌한 발걸음, 거만한 건지 무심한 건지 모르겠는 성격, 언제나 귀 한쪽만 꽂혀있는 이어폰. 흠…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 이 체코애랑 진짜 사귀어버리면 저 애랑은 영영 가망이 없는 건가?’
헉. 내가 생각하고 나도 조금 놀랐다.
‘그러니까 내가 저 이상한 재패니즈 프린스한테 마음이 좀 있긴 있는 거구나?’
그날부터 고민 모드에 들어갔다.
‘이 체코애를 튕겨버려야 하나? 근데, 내가 본 외국인 중에 눈 색깔이 제일 이쁜데. 진한 남색 눈이라니. 바라보면 사파이어 보는 것 같이 황홀한 눈. 흠. 그냥 놓치긴 좀 아까운 것도 같고. 흠… 그 스위스 애가 나한테 작업 건 것도 아닌데 이딴 고민 해서 뭐해. 아, 하긴. 생각 있으면 작업은 내가 걸어도 되긴 하지. 근데, 외국인하고 사귀어서 뭐할 건데…? 에이. 그런 고민을 지금 할 필요까지 있나.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거지. 근데, 얘는 어째. 튕겨 말어?’
갈팡질팡.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그러다 아주 어이없는 일로 체코애를 확 튕겨버리게 됐다. 상황은 이랬다.
어느 주말 체코애랑 함께 시내에 놀러 가기로 해서 약속시간을 잡았다. 나는 콜스 Coles 슈퍼마켓 주말 알바는 페이가 두배라(무려 시간당 4만 원, 보통 하루에 5시간 쉬프트를 받으니 20만 원짜리 알바인 샘. 지금도 알바 치고 괜찮은 페이인데 당시에는 정말 짭짤했다) 주말에는 일을 하고 싶었지만 매 주말 시간이 없다고 하는 것도 좀 아닌 것 같아서 큰 맘 먹고 알바를 뺐다. 그리고 기왕 나가는 거 간만에 꽃단장도 좀 했다. 게다가 지각대장인 내가 약속 장소에 5분이나 일찍 도착해서 기다렸는데, 어라? 얘가 안 오네? 정시는 물론 10분이 지나도 20분이 지나도 오지를 않는다. 결국 55분이나 늦어서 도착을 했는데, 전혀 미안해하는 기색 없이, “어 네가 먼저 왔네? 많이 기다렸어?” 하더니 싱긋 웃으며 가자고 하는거다. ‘야, 한시간이면 내 알바 페이가 얼만데, 이런 너므 시키를 봤나. 게다가 여자를 기다리게 하고 이렇게 당당하다니 니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니 그 파란 눈 색이랑 똑같이 멍들게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겠니?’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왠지 많이 기다렸다고 화내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아냐… 가자.’
시드니 시내에서 체코 음식을 먹고, 체코 비어도 마시고, 뭐 나름 재밌을 법한 코스로 다녔는데, 아침부터 기분이 상해서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안 그래도 마음이 갈팡질팡하는 마당에 나를 한 시간이나 기다리게 하고 미안한 기색조차 없다니.
기분이 그저 그런데, 집에 오는 길에 결정타 발생. 다음 주 토요일 애들이랑 타롱가 Taronga 동물원에 가자고 했더니 자기는 그날 알바가 있다고, 자기는 알바를 해서 매번 주말을 전부 너와 함께 보낼 순 없다고 하더라. 헐. 자기가 먼저 주말마다 자꾸 어디 가자고 해서 나는 겨우 시간 빼고 나왔더니 뭔 소리야 저건. ‘나도 오늘 20만원짜리 알바 있는데 널 위해 큰맘 먹고 뺀 거거든?’ 소리가 또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다시 한번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그래. 다른 애들이랑 가지 뭐.”
집에 와서 생각하니 사파이어색 눈이 아무리 이뻐도 안 되겠다. 영 기분이 찜찜하다. 이럴 땐 깔끔하고 신속한 이별 통보가 정답.
바로 그날 밤 문자를 날려 고민거리를 정리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학교에 도착해서 어이없는 사실을 발견했다. 매일 가는 시간에 도착했는데, 학교 문이 잠겨 있는 거다. 이게 무슨 일? 잠시 당황해서 학교 옆 빵집에 가 물었다.
❝
오늘 공휴일이에요? 왜 학교가 문을 닫았죠?
아, 어제부터 일광절약제(호주의 서머타임) 끝났거든요. 한 시간 늦어졌어요. 몰랐나봐요. ㅎㅎ 빵먹으면서 한시간 바닷가에 가서 앉아 계세요. 커피 한잔 서비스로 드릴게요.
아…… 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
그러니까 어제 그 애가 한 시간 늦게 온 게 아니고, 5분 일찍 왔던 거?!
헐… 이별 통보 다시 물러? 음… 그건 아닌 것 같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너는 내 운명이 아닌 거지.
안녕, 사파이어 눈(색)깔!
이 생각을 하면서 터덜터덜 학교로 다시 걸어가는데, 거짓말처럼 키 큰 스위스애가 맞은편에서 오면서 반갑게 인사를 한다.
❝
굿모닝!
어? 굿모닝~
내일 영화 5달러로 볼 수 있는 날이거든? 애들 몇몇 모아서 영화 보러 갈래?
(얘는 항상 다짜고짜 본론만 말한다. 주말 잘 보냈어? 등의 서론이 없는 문체) 어? 아. 그래~ 뭐 볼 건데?
XXXX.
아. 나도 그거 보고 싶었어.
굿.
어. 허허.
…
…
…
…
❞
침묵 속에 키 큰 스위스 아이와 학교에 도착했을 때 그 파란 눈의 체코 아이는 이미 내 머릿속에서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슈퍼 마리오가 맺어 준 커플
Our match maker was Super Mario
지난주 그 체코애가 퇴짜 놨던 동물원 얘기를 다른 애들한테 꺼냈더니 몇 명이 관심을 보였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얼마 전 생긴 내 팬클럽(풉!) 비스므레한 아그들. 몇 주 전 꺅꺅 거리는 일본 애들 몇 명 이 조심스럽게 오더니 “감자짱, 우리 감자짱이랑 친해지고 싶어.”라고 하는 거다. 헙. 웃기기도 하고, 은근 귀엽기도 해서 “친해지고 말고 할게 어딨어. 우리 이미 친하잖아? ^^;” 하고 대답했더니 그 특유의 리액션을 크게 보이며 (이때는 손뼉을 치며 ‘아임 쏘오 해피~’라고 외쳤다…ㄷㄷ) 그때부터 학교에 가면 껌딱지처럼 따라다닌다. 그러자 거기에 17살짜리 중국 여자애 두 명이 나를 왕언니(Big sister!)라고 부르며 합류. 이렇게 틴에이져 삘 일본인과 진짜 틴에이져 중국인 팬클럽이 생겨서… 내 학교 생활이 산으로 가고 있었다. 베이비 시팅 느낌.
근데, 얘들하고만 동물원에 가면 그야말로 초딩 소풍이 될 것이 아닌가. 얼마나 수많은 ‘카와이’를 남발해 댈까. 도무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냥 알바나 할까 싶었지만 이미 그날 대타를 구해놨고, 나는 그 동물원이 가고 싶었다. 그래서 급히 주변에 SOS 초대장을 날렸는데, 다행히 몇몇 성인(?)도 관심을 보여 보호자 역할을 나눠할 수 있게 되었다. 그중엔 그 키 큰 스위스 아이도 끼어 있었다. 근데, 재밌는 건 그 친구는 꺅꺅거리는 일본 애들이 데리고 온 거라는 거. 그는 그들의 프린스니까. ^^;
어쨌든 이렇게 예상치 못한 조합으로 동물원 주말 나들이를 떠났다.
아~상쾌하고 맑은 날씨.
꺅꺅 거리는 일본애들도 계속 얘기 나누다 보니 그 리액션에 조금 적응이 되고(성격도 참 밝고 착했다), 중국애들 둘은 뭔가 좀 산만하고 정신없었지만 역시 나름의 귀염성이 있었으며(어려서 그런지 얘들은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영어를 참 잘했다. 미친 스피드로 말해서 정신 사나웠을 뿐…), 스페인, 태국, 프랑스, 체코(썸남 말고, 다른 남자 사람) 친구 전부 좀 어딘가 스페이스였지만 나름 재밌는 캐릭터였다. (장소가 동물원이라 그런 걸까? 애들이 왜 죄다 스페이스…)
그리고 문제의 그 스위스 친구.
여태껏 파티나 영화관 또는 학교 소풍에서 여러 번 만난 사이지만 딱히 둘이 길게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다.
이날도 단체로 간 거라 딱히 긴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걷다 보니 우연히 나란히 옆에서 걷게 됐네? 그래서 어색한 침묵이 싫어 단답형으로 금방 끝날 걸 알았지만 대화를 시작했다.
❝
아, 그러고 보니 나는 니 나이를 모른다. 너 몇 살이야? (외국애들은 서로 나이를 잘 안 물어본다)
나는 23살. 너는?
25살. 내가 누나네. 한국 같으면 너는 내 이름 대신 누나라고 불러야 해. 누나는 한국어로 시스터라는 뜻이야ㅋㅋ (그들은 나이를 만으로 세서 우리도 그에 맞게 대답했다. 그나저나 어라? And you? 가 따라왔어라?)
시스터? 친누나가 아닌데도 다 누나라고 해? 루나(내 외국 이름)나 누나나 비슷한데, 튜나 Tuna (참치)라고 불러도 돼? ㅋㅋ
(헐. 썰렁한 농담도 할 줄 아네…) 23살이면 학교 바로 졸업했겠네? 전공은 뭐니?
컴공과. 너는?
아. 나는 생명공학.(일취월장이다. And you? 가 계속 따라오네.) 근데, 나는 직장은 전공이랑 관련 없는데 갔어. 연구실에서 처박혀 있지를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일반 회사 인사과에 취직했는데, 그것도 아니더라고. 사무실에 갇혀서 일 못하겠어. 매일 술 마시는 회식도 첨엔 좀 재밌었는데, 나중엔 힘들고, 사람 매일 만나는 것도 힘들고 (내가 다녔던 곳은 심하게 남자 위주의 회사였는데, 직간접적인 성희롱까지는 있었던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혼자 여행 다니고, 싸돌아다니는 직업을 찾아야지.ㅋㅋ (당시에는 여행작가 될지 꿈에도 모르고 했던 말이었다.)
그렇구나. 나는 아직 일은 한 번도 안 했는데, 올 하반기부터 친구가 일하는 회사에 소개받아서 일하게 됐어. 그때까지 영어나 좀 배워두려고 온 거지.
어. 그렇구나. (웬일로 이렇게 길게 대답을) 근데, 왜 옆에 영국 안 가고 호주로 왔어?
나는 말타(몰타)나 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호주 좋다고 해서 등 떠밀려 왔지. 좀 멀고, 비행기표도 비싼데 구태여 여기까지 와야 했는지 모르겠지만…
기왕 가는 거 멀리 가는 것도 재밌지 않아? 여기 풍경도 너무 독특하고. 나는 진짜 잘 온 거 같아.
멀어서 비싸잖아. 어차피 영어 배우는 게 목적이면 옆에 몰타도 좋거든. 스위스에서 호주까지 오는 비행기표 비싸. 그 돈으로 게임이나 더 사도 되는데. ㅋㅋ
게임? 비됴 게임? 뭐 좋아하는데?
음. 많지. 젤다의 전설, 슈퍼 마리오 ㅋㅋㅋ
아. 나도 슈퍼 마리오 어렸을 때 좀 했는데 ㅋㅋ 그렇지만 나는 디아블로나 스타크래프트 같은게 더 좋아. 대항해시대도 재밌고…
아, 너도 슈퍼 마리오 해? 스타도 하고? 역시 아시아 여자들이 쿨하다니까. 게임을 하는구나. 그러니까 말야 나는 수퍼 마리오를 열 살 때부터 했는데 말야, 그래서 어쩌구 저쩌구 뭐라 뭐라 닌텐도가 어쩌구, 피치가 어쨌는데, 마리오가 뭘 어째서 루이지는 그래서 이래서…(끝이 없음)…. 그랬던 거지. 너 스타 CD 가져왔니? 언제 한판 할래?
(워매… 눈에서 광채가 다 나네. 맨날 졸린 눈이 라고 했더니, 이렇게 광선 나올 거 같은 눈빛 처음 봐…) 어? 아… 아니. 뭐 어학연수 오면서 게임CD를 들고 오겠냐. 어학원 다니면서 알바 하기도 바빠서 호주 구경다닐 시간도 없다.
음. 그렇지. 그래도 나중에 함 같이 하자. 내가 씨디 구해볼게. ㅋㅋ 마리오도 같이 하면 좋은데~
어. 그… 그래~
❞
말을 이렇게 많이 할 수 있는 애구나.
게다가… 레알 오타쿠였다.
어쨌든 이날 이후로 우리는 더욱 자주 긴 문장으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공공장소에서는 키스를 하면 안 되거든요
No kiss in a public place
어느 날 독일인 남자 사람인 친구와 함께 시드니 시내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커플이 길 중간에 서서 키스를 아주 여얼~심히 하고 있는 거다. 물론 지금은 워낙 많이 봐서 별 감각이 없어졌지만 당시에 나는 서양 문화권 생활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아직 그런 풍경에 적응을 못하고 있을 때. 게다가 그냥 친구일지라도 남자 사람과 가는데 그런 풍경과 정면으로 맞닥뜨리니 나도 모르게 참 쑥스럽더라. 그래서 어색함을 깨려고 “아이 참. 쟤들은 왜 키스를 저렇게 길 한복판에서 하는 거지.” 하고 말했더니 이 친구가 “응? 그럼 어디서 해?”라고 대답하는 게 아닌가. “오잉. ㅋㅋ 아니 안 보이는데 가서 하지 왜 공공장소에서 해.”라고 했더니 “안 보이는데 어디?”, “몰라. 골목 구석이라든지, 좀 가려져 있는 곳? 아니면 집에 가든가. 호텔 잡던가 ㅋㅋ”, “아니 왜 무슨 중죄를 졌다고 키스를 그런데 가서 해. 그게 더 이상하고, 음침하다.”
헐. 그렇구나. 그들의 눈에는 그런가 보다.
어쨌든 나는 이 대화가 뭔가 웃겼기 때문에 얼마 후 키 큰 스위스 친구 및 다른 유럽 애들이 있을 때 그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다들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그럼 어디 가서 해???”
❝
(당황) 좀 안 보이는 곳. 가려진 곳. 집. 호텔. 등등.
풋. 그렇구나. 귀엽네. ^^
❞
같은 것에 대해서 느끼는 바가 모두 다르다.
공공장소에서의 키스가 어떤 사람에겐 민망하고, 어떤 사람에겐 아무렇지도 않고.
가려진 장소에서의 키스가 어떤 사람에겐 음침해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귀여워 보이고.
다시 또 몇 주 후.
이날도 알바 끝나고 친구들과 펍에서 한잔하기로 했는데, 이날은 내가 좀 피곤했던 모양이다. 원래도 와인이랑 그렇게 친하진 않지만 반잔 마셨는데, 벌써 기분이 알딸딸하네. 그래서 테이블에 약간 멍하게 앉아 있는데, 종업원이 나한테 오더니 묻는다.
❝
너 여권 잃어버리지 않았니?
여권? 그럴 리가. 그 소중한 걸?
아냐. 너 잃어버렸을걸. 가방 뒤져봐. 여권 하나 주워서 아래층 카운터에 뒀는데, 사진이 딱 너다.
에이. 나는 뭐 잃어버리고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러니까 내 여권은…(뒤적뒤적)… 여기… 없네?!
❞
당황스럽다. 칠칠맞지 못하게 뭘 잃어버리고 다니고, 그게 그 중요한 여권이라니…
아마 입구에서 신분증 검사할 때 보여주고, 가방에 잘 못 넣은 모양. (호주는 펍에 들어갈 때 모두의 신분증을 검사를 한다. 2013년과 2015년 호주에 여행으로 다시 갔을 때도 그랬는데, 요즘에는 모르겠음)
그래서 여권을 가지러 벌떡 일어서는데, 알딸딸 해서 내가 약간 휘청한 모양이다 (나는 못 느낌). 옆에 있던 키 큰 스위스 애가 내 팔을 잡아 나를 바로 세워준다. 그러더니 아래층에 같이 가주겠다고.
‘이상하네. 나 안 취한 거 같은데…?’
어쨌든 같이 내려가서 카운터에 말하니 여권을 바로 내줬는데, 진짜 내 것이 맞네, 맞아. 민망하고, 어이없고…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뭐 살다가 한 번쯤 그럴 수도 있는 일인데, 당시 술김에 생각할 때 칠칠맞지 못한 내 모습이 쑥스러웠는지 나선형 계단을 함께 올라오며 말했다.
❝
정말 이상하네. 나는 뭐 잃어버린 적이 내 평생 거의 없는데, 어떻게 이게 저기 가 있지? 정말 처음이야, 처음. (이때 드라마 도깨비가 나오기 훠얼~씬 전인데, 내가 딱 이렇게 말했다 ^^;)
ㅋㅋ 그래?
어어. 진짜야, 진짜. 처음이야, 처음.
그럼 오늘 내친김에 다른 것도 처음 해볼래?
…어? 뭐?
너 공공장소에서 키스해 본 적 없다며.
(꿈뻑꿈뻑)
…
…
❞
그 후 나의 기억은 그 애의 입술 모양을 흘깃 쳐다보며 ‘흠… 모양이 내 취향은 아닌데?’ 하고 생각했던 것 같고(ㅋㅋ), 잠시 후 내 입술에 뜻뜨 미지근 한 무언가가 닿았던 것 같으며, 아무래도 공공장소는 쑥스러워서 그 애를 스윽 밀쳐내고, 혼자 계단을 올라왔던 것 같다.
스위스 사람은 데이트도 초콜릿 카페에서!
Chocolate date with a Swiss man!
다음날 아침, 머리가 지끈지끈.
나는 증류주엔 늘 테이블에 제정신인 마지막 승자로 남지만 발효주엔 정말 취약하다. 여권을 잃어버렸던 그날도 애들이 레드와인을 병으로 계속 주문하는 바람에 다음날 심한 숙취에 쩔어 좀비같이 어학원으로 향했다.
‘아… 된장. 오늘 오후에 카페 알바랑 레스토랑 알바 둘 다 있는데…’
당시 나는 카페, 레스토랑 두 개, 슈퍼마켓까지 총 네 개의 알바를 뛰었다. 원래 학생 비자는 알바시간이 주당 20시간으로 제한이 있었지만 월급을 현금으로 받으면(기록 없이 불법으로), 더 많이 일할 수가 있었다(십 년 공소시효 지났으니 밝힌다. ^^;). 가끔 일하는 카페나 레스토랑 앞에 경찰이 지나가면 마음이 쫄렸지만 덕분에 한국 대기업 다닐 때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는 즐거움도 있었다. 그걸로 혼자서 학비와 숙식비 모두 해결이 가능했기 때문에 원래 6개월 어학연수만 하려고 갔던 건데, 결국 다른 학교에 등록해서 약 2년을 호주에서 머무르게 되었던 것.
어쨌든 그날도 알바가 두 개나 있는데, 전날 너무 달려서 잠시 후회의 아침을 가지며 곰곰이 생각해 봤다. 평일에 내가 왜 이렇게 달렸을까…
음…
..음…
…아…!?!
갑자기 나선형 계단이 생각나면서 혼자 쑥스러워서 살짝 얼굴을 붉혔다.
된장. 어학원 가서 마주칠 텐데, 민망해서 이를 어쩐다.
그래서 그날은 화장실 한 번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우리 교실 밖을 나가지 않았다. 점심도 샌드위치를 사 갔기 때문에 교실에서 먹었다. 뭐, 몸 컨디션이 시체 같아서 별로 움직이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고.
낮에 교실에 엎드려 찬찬히 생각해보니 전날 그 계단을 올라와서 혼자 쑥스러워 평소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레드와인을 홀짝홀짝 계속 마셨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친구들은 모두 시드시 시티에 살았기 때문에 맨리에서 마지막 페리 시간 전에 모두 돌아갔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 집에 걸어가고 있었는데, 길에서 친한 일본인 친구 카나코를 딱 만났네? 마침 계단에서의 사건(?) 때문에 입이 근질근질했던 차라 그 애와 다른 펍으로 이동해 밤새 폭풍 수다를 떨었다. 그 친구도 그때 뉴질랜드에서 온 젊은 학원 선생이 그 친구한테 계속 작업을 걸고 있어서 할 얘기가 많았던지라 둘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새벽까지 달렸던 거다. 아… 그래서 내가 이렇게 피곤하구나. -_-;
학원에서 다행히 한 번도 그 키 큰 스위스애를 마주치지 않았다. 무사히 건물을 빠져나와 카페 알바 장소로 가는데 성공!
몸은 피곤했지만 상큼한 척 알바를 마친 후 카페 문을 열고 나왔는데, 카페 문 옆에 못 보던 기둥이 있다. 바로 그 키 큰 스위스애가 거기 뙇 서있네? 문을 막고 있어서 피해 갈 수 없는 상황.
❝
어? 너 여기서 뭐하니.
너 기다렸지.
나? 왜?
우리 얘기 좀 하자. 너 초콜릿 좋아하니?
초콜릿? 어? 어…
맨리 워프에 맥스 브레너 초콜릿 카페 생겼는데, 거기서 핫초코 한잔 하자.
그… 그래~
❞
푸핫. 커피도 아니고 핫초코 한잔이라니.
초딩 데이트 같아서 웃음이 났지만 사실 나는 커피를 안 마시고, 그 친구도 나중에 알고 보니 커피를 안 좋아하더라. 그래서 초콜릿 카페가 우리에게 딱 맞았던 것. 그리고 사실 맥스 브레너는 매우 유명한 초콜릿 카페로, 그 당시 그 동네에서 매우 핫한 장소였다. 당시에 나는 그걸 몰랐지만 어쨌든 그날 마셨던 ‘이탈리안 핫 초코’는 지금까지 내 인생 핫초코로 남아 있다.
내 새 남친은 홈리스
My brand new homeless boyfriend
다음날은 금요일이었다.
나는 새벽 4:30분에 슈퍼마켓 오프닝 알바를 했으므로 남들보다 어학원에 일찍 도착했다. 그날도 슈퍼마켓 알바를 마치고, 8시 조금 넘어 학교에 도착. 수업시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컴퓨터실에서 토닥토닥 싸이월드를 하고 있었는데, 그 키 큰 스위스 친구가 컴퓨터실로 성큼 들어왔다.
❝
안녕~
어, 안녕~
일찍 왔네?
어. 너도 일찍 오네.
응. 페리 시간이 일러서.
그렇구나. 그래~ 좋은 하루 보내~
❞
흐헙.
핫초코를 같이 한잔 했지만, 그게 얘가 내 남친이란 스탬프는 아니므로 여전히 그저께 일이 쑥스럽고 어색하다. 빨리 대화 끝내고 보내버려야지.
근데, 얘가 안 가고 가만히 서서 쳐다보고 웃더니 컴퓨터실을 나가려다 말고, 뒤돌아서 말했다.
❝
참, 월요일날 애들하고 비치 파티하기로 했어. 학교 전체 공지 날린 건 아니고, 그냥 XX…. XX 만 오는 거야.
어어. 그렇구나.
❞
월요일은 알바가 있는 날이고, 무슨 의도로 파티 얘기를 하나 확실치 않아서 그냥 저렇게만 대답했다. 돌다리도 두드려야지.
그랬더니 이 친구가 헛, 하고 웃더니 성큼성큼 걸어 내 옆으로 왔다. 그리고 내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내게 물었다.
❝
너도 올래?
❞
‘뭐… 뭐지. 이 프러포즈 자세는?’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잠시 그 애 눈을 내려다봤는데, 눈이 카키색이다. 남색 눈처럼 빨려 들어가는 색은 아니었으나 눈매가 맑고, 참 선하게 생겼다. 그리고 입고 있는 카키색 옷하고 눈동자 색이 똑같아서 잘 어울렸다.
❝
음… 그래. 알바 끝나고 갈게. 나는 많이 늦을 거야.
❞
주말의 나는 알바 머신.
폭풍 같은 주말이 지났고, 월요일이 됐다. 월요일엔 저녁에 레스토랑 알바 하나밖에 없어서 조금 편한 날이었다 (다른 요일엔 카페 알바와 레스토랑 알바가 차례로 있었다). 게다가 마침 그날은 손님이 많이 없다고 한 시간 일찍 닫은 덕분에 9시에 알바가 끝났다. 쉘리비치에 도착했더니 애들이 깔깔 거리며 놀고 있다. 내가 도착하자 다들 무지무지 반갑게 맞아 주며 다들 서로 와인잔을 들이댄다. 안 그래도 와인은 내게 쥐약인데… 십 분 만에 7시부터 와서 놀고 있던 애들 상태를 따라잡았다.
즐겁고, 신나고, 로맨틱하고 기타 등등한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마지막 페리 시간.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외국애들은 이 노래 모르는데, 내가 막 불러줬던 것 같다. ^^;
내 평생 필름이 딱 세 번 끊겼는데, 이때가 두 번째 날이었다. 사실 완전히 끊긴 건 아니고 기억은 그럭저럭 할 수 있는 상태였지만 피곤해서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져 휘청거렸더니 그 스위스 친구가 나를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오다가 기운 빠져서 맨리 비치에도 앉아 있고, 맨리 코르소 스트리트 중간에 있는 벤치에서도 한참 쉬고, 토하는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서 스위스 애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후 남의 집 앞 화단 사이에도 쪼그려 앉아 있고 했더니 원래 20분이면 오는 거리를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려 집에 도착했다. (나는 사실 시간은 기억이 안 나지만 나중에 오이군이 그 정도 걸렸다고 하더라.)
그리고 나는 그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한 후, 3층 우리 집으로 올라와 불도 켜지 못한 채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꿈나라로 급행열차를 탔다.
다음날은 새벽 알바가 없는 날이라 아침까지 푹 자고, 학교에 갔다.
지난밤 몸은 반기절 상태였건만 기억은 대부분 나서(그렇게 생각했다…) 혼자 낄낄 웃으며 학교에 갔는데, 키 큰 스위스 애가 벌써 학교에 와 있더라. 근데,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나오네?
❝
굿모닝~
(약간 풀린 눈으로, 그렇지만 반갑게) 굿모닝! 어제 잘 잤어? 올라가는 거 봤는데, 불이 안 켜져서 걱정했어.
불 켤 정신이 있었겠니. 그대로 쓰러져 잤지. 어, 근데 너 페리 타러 달려가야 하는 거 아니었어? 불 켜지는 거 볼 시간이 있었나 보네.
페에리?? 핫, 그건 진작에 마지막 배까지 놓쳤지. 너랑 맨리 비치에 앉아 있을 때 이미 막배 떠났었어. ^^;
어멋?! 그럼 어떻게 집에 갔어?
집? 당연히 못 갔지. 그 시간에 맨리엔 택시도 없더라.
오잉. 그럼 어디서 잤니?
한참 니 방에 불 켜지는 걸 기다렸는데, 안 켜지더라고. 그래도 어쨌든 올라가는 거 봤으니 잘 갔으리라 믿고, 혼자 터덜터덜 걸어 선착장 근처로 가는데, 어떤 집 앞에 침대 매트리스가 하나 버려져 있었어. 재활용 버리는 날이었나 봐. 그래서 그거 질질 끌고 골목 구석에 놓고 거기서 잤어.
진짜야? 믿을 수 없어.
진짜야. 못 믿겠으면 있다가 매트리스 있는 곳에 가서 보여줄게 ㅋㅋ
진짜였어도 재활용 쓰레기 오늘 낮 다 수거해 가겠지. 진짜 노숙했어? 요즘 쌀쌀한데?
아, 그렇네. 어쨌든 정말이야. 뭐 술김이라 안 춥더라고. 매트리스도 생각보다 편했고. 그럭저럭 잘 잤어.
믿을 수 없다.
너네 집으로 출발할 때 내 막차 시간 다 됐던 거는 기억나? 근데, 비치에 앉아 있고, 벤치에 앉아 있고 했으니 당연 그걸 놓쳤겠지 않니? 그걸 놓쳤으면 그 시간에 내가 어디 가서 잤겠어.
맨리 누군가 친구네 집에서? 백팩커스? 호텔?
맨리에 너 말고 누가 살아. 대부분 다 시티 살지. 글구 그 시간에 백패커스 카운터도 닫지 않나… 호텔은 넘 비싸고. ㅋ
그렇네. 그래도 믿을 수 없는데…
진짠데…
❞
그날의 노숙 스토리는 지금까지 믿기 힘들지만 그렇게 우리는 본격적으로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사이로 접어들었다.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Summer Christmas
이렇게 시작된 우리 사이는 그 이후에 진짜 데이트 다운 데이트도 하고, 친구들과 뉴질랜드 여행을 가면서 훨씬 더 가까워졌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이 친구가 나에게 정말 정말 진심인지 아니면 그냥 여행지의 즐거운 추억쯤으로 여기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외국인이라 뭔가 한구석에 얘는 진심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던 것도 같고. (고지식한 외국인 선입견?!)
어쨌든 설렘 속에 재밌었던 몇 달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어느덧 그가 약속한 스위스 회사로 출근할 때가 되었다. 지겨운 장거리 연애의 시작.
사실 나는 연인은 옆에 두고 자주 보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가 돌아가면 그걸로 이제 안녕이라 생각했는데, 이 친구는 스위스에 가서도 자주 나에게 연락을 했다. 전화로 자기 생활을 들려주고, 계절이 바뀌면 계절에 맞는 음악을 들려주었으며, 종종 비디오 채팅으로 자기네 집을 보여주거나 동네의 영상을 담은 CD를 보내주었다. 가끔은 스위스 초콜릿이나 꽃다발을 보내기도 했고…
피휴. 얘가 빈자리 더 느껴지게 왜 이런대. 나는 다른 사람 만나서 계속 재밌게 호주 생활을 이어가야겠다 생각했는데…(근데, 사실 마음이 콩밭에 있어서 누굴 봐도 관심이 안 생기긴 하더라.)
이 친구가 계속 연락을 하니까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동안 알바로 힘들어도 그저 재밌었던 호주 생활이 갑자기 전부 회색빛이 되었다. 내 호주 생활 암흑기. 새로운 학교에 들어가 새로운 친구들을 잔뜩 사귀었는데, 그것도 그냥 큰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파티도 지루하고. 그래서 알바 시간을 더 늘려 하루에 세 시간 반을 자며 학교와 알바로 내 시간을 가득 채웠다. 마음이 비었으니까 통장이라도 채워야지.
그렇게 빡쎈 몇 달이 지나고 또다시 크리스마스 시즌. 호주는 크리스마스 때가 완전 한여름인지라 분위기는 안 났지만 그래도 휴가다 뭐다 현지인들에겐 설레는 시기다. 그러나 나에게 이 시기가 해리포터한테 그랬던 것처럼 가장 지루한 시간이 될 것이 뻔했다. 호주는 크리스마스 색도 초록색이라(이유는 모름. 간혹 초록 산타도 돌아다닌다. 누군가 코카콜라의 마케팅에 반기를 드는 거라고 하던데, 진짜인지는 잘…) 사람들이 초록 옷을 입고 돌아다녀서 분위기도 안나지, 학교도 방학이지, 알바하는 레스토랑은 휴가시즌이라 며칠간 문을 닫는다고 하지…
지난해에는 어학원에 전날까지 수업이 있어서 같이 파티도 하고, 홈스테이 가족들과 살 때라 파티도 하고 선물도 주고 받았는데, 올해는 삭막한 성격의 친구들과 자취를 하고 있는 중이라 교회 말고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전혀 없더라. 그럼 크리스마스 주에는 그냥 슈퍼마켓 알바하고, 해변에 가서 수영이나 해야겠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이주 전 갑자기 그 스위스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
안녕~ 나 크리스마스 휴가에 호주 갈려구!
오잉? 정말?
어. 내 회사 첫 휴가는 너랑 보내겠어!
뭐시라? 요즘 휴가철이라 엄청 비쌀텐데, 뭐 하러 와.
응. 비싸긴 하더라. ㅋㅋ 그래도 어쨌든 비행기 예약했어. 나 간다, 다다음주에!
정마알?
❞
믿기지 않았다. 겨우 2주 휴가를 위해 휴가철 바가지 비행기 삯 350만 원을 내고 호주로 온다니. (그 당시 평소 스위스-호주 비행기 값은 150~180만 원 정도 했었다. 350만 원은 정말 극성수기 바가지요금.) 그래서 그때 생각했다.
‘헐. 이 정도 돈 들여 올 정도면 나를 정말 좋아하기는 하는구나!’
돈에 넘어가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기는 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오이군은 정말 내가 만난 사람 중에 손가락에 꼽히는 자린고비라는 거다. 어학연수도 호주 비행기값 비싸니 안 올려했었다는 건 위에서 이야기했고, 옷차림도 그랬다. 나와 첫 단둘이 데이트를 하는데, 입고 온 바지에 구멍이 나있더라. 빈티지라고 하기엔 정말 허름하게 구멍이 났고, 무릎이 닳아 반질반질했다. 물어보니 10년이 넘게 입은 바지라고 한다. 그리고 천으로 된 지갑을 가지고 다녔는데, 그것도 낡아서 실밥이 다 풀어지고 꼬질꼬질하더라. 파티에 같이 장을 보러 가도 비싼 소시지는 절대 안 샀다. 오로지 1달러에 여섯 개 든 똥냄새나는 소시지. 돈 더 걷어서 맛있는 거 먹자니까 어차피 다들 취해서 맛도 모른다며 그거 사란다. 늘 그랬던 그가 회사 다닌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라 돈도 별로 없을 게 뻔한데, 비행기 값 350만 원을 내고 겨우 2주를 위해 오겠다는 건 꽤나 진지하다는 이야기!
드디어 12월 25일이 되었다.
정말 오는 건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기 전까지 뭘 잘 믿지 않는 성격이라 전날까지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근데, 25일 정말 그가 나타난 거다. 오후에 온다고 하더니 깜짝쇼를 한다며 아침 일찍 내가 자취하고 있던 집으로 산타모자를 쓰고서 불쑥. 긴가민가 했던 나는 무척 깜짝 놀랐고, 사자머리를 한 채 자고 있던 나의 룸메이트도 기절초풍했음은 말할 것도 없고.
그날로 그렇게 그는 나만의 산타가 되었다.
그간의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사이에 종지부를 찍고, 이제는 완전한 내꺼로 인정. 뭐 그 이후에도 지루한 장거리 연애가 이어졌지만 그래도 이제는 진짜 내꺼와 나름 알콩달콩한 장거리 연애라…견딜만 했다…는 아니고, 힘들지만 견뎠다.
그렇게 그해 크리스마스, 우리는 한국 감자와 스위스 오이로서의 함께 첫발을 내디뎠다.
외전 : 그 남자 스토리
Spin-off : His story
머언 훗날, 어느 날…
❝
자갸.
응?
나 버스에서 처음 봤을 때 내 첫인상이 어땠어?
헷. 나 너 버스에서 처음 보지 않았어. 그전에 학교에서 먼저 봤어.
어머? 진짜?
응. 학교에서 봤는데, ‘우와. 저 여자애는 옷을 참 특이하게 입었네? 게다가 머리 색깔이 거의 무지개 색이야. 신기하다. ‘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첫인상이 좋았다는 거 나빴다는 거?
신기한 거.
그게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신기한 거~
그게 뭐야. -_-; 그럼, 버스에서는 왜 그렇게 말이 짧았어? 신기한 여자랑 말하기 싫었어?
아니. 다 못 알아 들었어. 나 호주 간지 일주일도 안됐을 때잖아. 대체 얘는 뭐라는 걸까. 하고 생각했었어. 자기가 말이 좀 빨라? ㅋㅋㅋ
푸핫… 쏘리.
괜찮아. 이제 한국말이나 좀 천천히 해줘.
그렇게 힘든 걸 부탁하고 그래… 난 천천히 말하면, 말하다 중간에 내가 할 말을 잊어버린단 말이야. ^^;
❞
❝
그리구우~ 펍에서 여권 받아 오면서 나한테 왜 그랬어?
뭘 왜 그래?
뽀뽀 했쟈나아~~
음… 여권 사진이 이쁘더라구.
여권 사진만? 실물은?
뭐… 여권사진이랑 좀 닮은 것도 같고. ㅋㅋ
쥬글래?
ㅋㅋㅋ
-_-+
이거시 그 여권 사진. 24살의 그리운 내얼굴…^^;
❝
아참, 그리구우~ 그때 그 노숙 스토리. 길에 버려진 매트리스에서 잔 거 진짜야?
왜 지금까지 못 믿고 그래. 진짜라니까.
믿기 어렵지. 마침 매트리스가 버려져 있었다는 것도 그렇고.
헐. 이상한 걸 의심하네.
그럼 왜 내 방 아래서 불 켜질 때까지 기다렸어? 달려가서 페리 타지?
페리는 버얼~~~ 써 놓쳤었다니까? 나는 네가 아는 줄 알았지. 나 페리 놓친 거. 그래서 불러줄 줄 알고 기다렸는데, 불도 안 켜지더라고. 그래서 어디서 자나 싶어 배회하다 매트리스 찾은 거야.
푸하. 어떤 홈리스가 맡아 놓은 매트리스 자기가 훔쳐갔나 보다. 어쨌든 위험하게 밤에 강도당하면 어쩔라고 노숙을.
그럼 어쩌니. 네가 날 너네 집으로 안 불러 주는데. 그 새벽에 어디서 잘 곳을 구할 수 있겠니.
응큼하기는. 내 남자 친구가 될지 아닐지도 확실히 모르는데 방에 뭘 불러. 글구 그때 떡실신 상태라 전혀 몰랐지. 페리를 놓친것도 아래서 기다린 것도…ㅋㅋ 진짜 노숙한거면 정말 쏘리. 알았으면 거실에서 재워주는 건덴…
헐. 나 니 남친이 아니었어? 그날 맨리 비치에 앉아서 네가 나한테 키스했잖아.
…내가?
헐. 남의 집 화단 사이에 혼자 가서 토하고 온다더니 나보고 기다려 줘서 고맙다고 입 쓰윽 닦고 또 키스한 건 생각나니?
아아니? (드…드럽…)
집에 들어가기 전에도 니가 잘 가라며 나 붙잡고 키스했는데. 그쯤 되면 내가 집으로 불러 주겠다고 생각을 안 하겠니?
오우. 노우. 전혀 기억 안 남.
세상에. 너는 기억도 못하는데, 내가 순진하게 낚였던 거구나.
푸하핫. 다 거짓말이지? 못 믿어. 내가 그랬을 리가.
억울하다. 내가 길에서 노숙하면서까지 너 데려다주고, 혼자 남친이라고 믿고. -_-+
푸하하. 아놔… 증거를 대 증거를.
증거가 어딨냐. 한국이었으면 CCTV라도 달려 있었을텐데, 거긴 그런 것도 없고. 난 그냥 억울해.
ㅋㅋㅋㅋㅋ 나 못 믿어, 못 믿어. 자기가 노숙 했다는 것도 내가 키스했다는 것도 다 못믿어.
믿지 마라. 의심 쟁이야. 난 어쨌든 삐졌어.
ㅋㅋㅋㅋㅋ 삐져. 거짓말쟁이야.
…-_-+
ㅋㅋㅋㅋㅋ
-_-+
ㅋㅋㅋㅋㅋ
❞
‘before 토종감자 수입오이’ 이야기
2005-2007
아래는 이전에 쓴 감자오이의 러브스토리입니다.
첫 만남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아래 글을 차례대로 읽으시면 됩니다.
저도 감자님 글과 사진을 보며 두분의 처음은 어땠을까 생각했었는데 오늘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드라마 한편 본 것 같아요+_+
흥미진진해서 눈을 뗄수없이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꽤 예전 일인데 방금 일어난 일처럼 대화내용을 적어주셔서 더 몰입해서 보았어요
처음봤는데 오래전에 만났던 사람 알아본거같다는 말이 많이 와닿네요
내 짝이 될사람은 그렇게 알아보게 되나봐요~
언제나처럼 행복하게 지내시길 바라며…
이만 총총
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저는 최근 일들은 금방금방 까먹는데, 옛날 일들은 찬찬히 생각하면 대화는 물론 그 순간의 냄새나 공기의 느낌? 뭐 그런 것 까지 다 떠오르더라구요. 특히 사진이 있으면 되게 세세하게 기억이 나요. 그래서 열심히 사진을 찍는가봅니다 ㅋㅋㅋ 다 잊어버리는 최근 일들도 한 십년쯤 지나면 세세하게 기억이 날까요? ㅋㅋㅋ
저도 오이군 처음 봤을 때를 생각하면 조금 신기해요. 어른들이 인연은 알아본다고 하시던데, 그게 정말인가 싶기도 하고, 그냥 첫눈에 반한걸 그렇게 기억하나 싶기도 하구요 ㅋㅋㅋ
자세한 러브스토리 감사합니다~.
예전에 본 영화가 미니시리즈 드라마로 재 제작되어 나온 것을 보는 느낌이네요 ㅎㅎ
사파이어 색 눈은 일광 절약제때문에 감자님을 잃었군요. 이렇게 억울할 데가… ㅋㅋ
“55분이나 늦어서 도착을 했는데, 전혀 미안해하는 기색 없이”에서 살짝 눈치챘어요. 일광 절약제는 아니고 저도 시간대 착각으로 겪은 일이 있었거든요.
그나저나 당연히 문과 출신이시라고 생각했는데, 생명공학 전공이라니… 충격입니다.
동물원 사진
♪ ♫ ♩ 솔 미 도 ⇧도 ♪ ♫ ♩
♪ ♫ ♩ 미 도 ⇧도 시 레 ♪ ♫ ♩
ㅎㅎ 재밌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광절약제…스위스에도 있어서 이제 쬐끔 익숙해 졌는데, 호주에 갔을 때는 정말 생각도 못했지 뭐예요 ^^;; 그러고 보니 저 아주 어렸을 때 한국에도 2년 동안 시행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시간여행하는 것 같고, 정말 신기했던 생각이 나요.
오~근데, 키차이를 보시고 악보를 떠올리시다니, 절대 음감!!!?? ^^ 저 어렸을 때 숫자 천재 같은 그런 애가 반에 있었는데, 그 친구는 어떤 단어를 들으면 숫자로 먼저 떠오른다고 했어요. 그래서 사람 이름이 소수면 뭔가 불안정한 느낌이라서 그 사람이 불편하다고 하더라구요 ^^;;
푸흐흐 예전에 슈퍼 마리오 얘기 본 기억나요! 2005년이면 저도 인도 처음 온 해인데 와, 전 아무런 기억이 없는데… 이렇게 상세히 기억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저희도 여권 때문에 처음 엮이게(?) 되었는데 역시 외국에선 여권이 제일 중요하네요(????) ㅋㅋㅋㅋ 너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토감수오 뽀레버 ㅋㅋㅋ
앗, 라씨님 😆 블로그까지 방문해주시고, 감사합니다. 저도 기억이 없어졌었는데, 사진보니까 주르륵 생각나네요. 역시 그래서 제가 사진을 많이 찍어요. 기억 저장용 ^^; 와. 라씨님도 인도에 그때 가셨었군요! 게다가 두분도 여권 때문에 만나셨다니 비하인드 스토리 넘 궁금해지네요. 언제 한번 풀어 써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