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글입니다. 앞 이야기(스위스, 크로아티아, 북해도, 태즈매니아, 뉴 칼레도니아 한달살기)를 못보셨다면 여기를 클릭해 주세요.
8. 바누아투 한달살기 : 식인종이 살던 곳
태평양 섬 여행의 하이라이트.
그렇다. 바로 감자와 오이가 꼽는 하이라이트는 바로 바누아투였다.
아직 현대문명이 완전히 자리잡지 않아 어중간한 과도기를 걷고 있는 곳으로 태평양 섬들 전체에 퍼져 있었던 식인이 1969년까지 행해졌다니 말 다했지. 그만큼 신문물이 늦게 들어간 곳이고, 그래서 투박할 수 밖에 없는 매력에 완전히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곳에도 이제는 기독교 문화가 널리 자리잡아 더이상 식인을 하지 않게 되었지만, 수도 포트빌라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부족단위 마을생활을 한다. 그중 몇몇 부족은 마을 입구에 작은 민속촌(원두막과 초가집)을 재현해 놓고, 방문자들을 위해 전통공연과 생활모습을 재현하는데, 이게 생각보다 꽤 재미있었다. (예약필수) 그들도 지금은 시멘트와 벽돌로 지어진 집에서 TV와 냉장고 등 문명의 이기를 누린다고는 하는데, 여전히 대부분의 인구는 판자집같은 곳에 거주하며, 마당에 판 구덩이에 장작불을 지펴 요리를 하므로 전통 마을이 실제 생활 모습과 어느정도 흡사 했던 것.
그나저나 마지막 식인이 1969년이었다면 그 이전에 태어난 어르신들의 일부는 아직도 인육의 맛을 기억한다는 이야기? 흐음…한번 맛보면 잊지 못한다는 인육의 맛. 혹시나 여기 가신다면 밤길 조심하시길. ^^;;
사실 식인이 있었던 것과 관계 없이 우리가 만난 바누아투 사람들은 전부 참 해맑고 친절했다. 어딘가 우리나라 해방기적 분위기를 풍겼는데, (난 해방기때 안살아 봤지만 그랬을 것만 같은) 인터넷도 들어간지 몇 년 안되서 데이 투어중 가이드 아저씨가 이런 질문을 하더라.
❝ (오이군에게) 직업이 웹개발자라고 했죠? 그럼 하나만 물읍시다. 내가 인터넷에 들어가서 뭘 물어보면 그 대답이 쫘르르 나오잖아요. 그럼 그게 사람이 대답을 하는 겁니까, 아니면 컴퓨터가 대답을 하는 겁니까? 난 그게 신기하고, 도무지 이해가 안돼. ❞
외국인을 자주 접하는 가이드 아저씨가 이렇게 물어볼 정도로 대부분의 현지인들은 순진했지만 여기에도 호주, 뉴질랜드인들이 지어 놓은 럭셔리 리조트나 펜션들도 많이 있다. 도시는 늘 열심히 갈아 엎어지며, 무언가 공사중이고, 유명한 관광지에는 이제 중국인의 손길도 닿아 반반한 도로도 놓이는 중이다. 그래도 아직 83개의 섬 중 본섬 에파테 Efate를 제외하고는 때묻지 않은(원시적인) 곳이 대부분이니 그런 곳을 찾는 다면 빨리 다녀오시길.
우리는 에파테 Efate섬과 에스피리투 산토 Espiritu Santo섬 그리고 타나 Tanna섬 세곳에서 총 한달을 보냈다. 각 섬마다다 색이 다른 블루홀(푸른 연못)과 폭포가 많이 있어서 찾아다니며 수영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넓이가 흔히 10미터가 넘는 거대한 반얀 트리들은 또 어떻고? 세계에서 가장 큰 반얀트리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그 넓이가 무려 200미터나 된다. 게다가 2차 대전때 가라 앉은 미군 군함이 있어서 세계적인 난파선 다이빙 포인트이기도 하다. 난파선 다이빙 싸이트로는 세계 최대 규모인데, 한 배안에 다이빙 포인트가 무려 20개나 된다고!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아쉽게도 오이군이 중이염이 심하게 걸리는 바람에 바누아투에서는 다이빙을 하지 못했다 ㅠ_ㅠ
섬나라 치고 먹을 것도 풍부했다.
보통 이런 작은 섬나라는 공산품 뿐만 아니라 식재료가 대부분 수입이라 가격도 높고, 물량도 많지 않는데, 여긴 호주, 뉴질랜드 사람들이 많이 건너와 궁전같은 대저택을 짓고 살다보니 슈퍼의 물건들이 비교적 양호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우리 취향에 완벽했는데…
아쉽게도 이곳도 내가 평생 살곳은 아닌 듯 하다.
어떤 섬엘 가도, 아무리 좋은 리조트엘 가도 밤만 되면 검지 손가락 만한 바퀴벌레가 신나게 출몰했던 것!
독일바퀴 사이즈만 됐어도 자연이 너무 멋지니 함 참아볼려고 했는데, 크기가 한국 숲바퀴 1.5배. 나는 편의시설은 부족해도 살 수 있지만 이런 큰 벌레들은 감당할 수가 없다. 하루에 한두 마리는 기본이고 많은 날은 열 대섯 마리도 나타났다. 집에도 살고, 창문으로 날아 들어오기도 하고. 두번째 숙소에서는 매일 밤 방에 귀여운(?) 생쥐도 돌아다녀서 결국 생쥐 4마리와 커다란 지네 한마리, 초대형 바퀴 두마리가 방에서 난리부르스를 치던 어느날 밤 울면서 마을 한가운데 있는 공산당 건물같이 생긴 호텔로 대피하는 소동도 있었다. 깍뚜기 모양 공산당 건물은 새 호텔이라 쥐도, 바퀴도, 게코 도마뱀도 나오지 않았지만 그런데 짱박혀 있을려거면 바누아투에 가는 의미가 없다. 바누아투는 뭐니뭐니해도 대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바닷가 숙소에 머물러야 제맛이다. 대왕 바퀴벌레가 괴롭힌다 할지라도…
9. 피지 10일 : 12년차 허니문
피지에서도 한달살기를 할까 싶었는데, 수도인 수바 Suva에서 한국교민을 대상으로한 강도가 날뛴다는 소문이 자꾸 들리더라. 며칠 호텔에서 머물며 치고 빠지는 관광객이야 별 상관 없는데, 거주하는 한인 대상 범죄라니 이거 일반 주거지역에서 한달살기 하기가 조금 망설여 지잖아?
사실 어느 나라를 가도 범죄의 위험이 없을 수는 없다지만 왜 또 여기는 한국인을 콕 집어서 강도질을 하는 걸까… 뭐 정 원한다면 안전한 동네를 열심히 검색해서 머물 수도 있었겠지만, 이때 한참 일이 많아서 내가 번 아웃 상태였다. 검색이고 뭐고 세상만사 다 귀찮길래 스위스 가이드북 탈고 기념을 핑계로, 3년간 다리 절어가며 고생한 나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다. 허니문 때도 안간 고급 리조트에서 넋 놓고 굴러 보기로 한 것!
이곳에서는 내내 표정이 밝았다. 오이군도 이런 휴가 별로 싫지 않은 듯? ^^;
고급 리조트는 계획 외 지출이라 우리 생활비가 아닌 나의 비자금을 탈탈 털어 오이군과 상의 없이 무대포로 예약을 해버렸다 ^^; 어차피 오이군은 내일 당장 우리가 어디로 일을 하러 가는지, 휴가를 가는지도 잘 모르기 때문에 예약 잡아 놓으면 그냥 군소리 없이 잘 따라 오는 순딩이. 나는 그런 오이군을 위해 그의 회사 연차 날짜까지 계산해서 휴가도 셋팅해 드리는 마누라 겸 개인 비서로 이번 피지행은 우리 모두에게 순수 휴가 였다.
허니문도 라스미 미뉫 땡처리 호텔로 갔다온 나는 보통 배낭여행 스타일 여행자라서 취재가 아닌 개인 여행으로는 이곳이 처음 가본 리조트였다. 따라서 이렇게 리조트에서만 머물며 시설 자체를 만끽해 보기도 처음 ^^; (취재로는 아무리 고급 리조트를 갈지라도 사실 리조트를 구석구석 즐길 시간적 여유가 없다.) 작은 리조트인데다가 비수기였고, 수상 방갈로와 방갈로쪽 수영장은 성인 전용이기까지 해서 매우 조용하고, 한가롭더라. 소나기 하루 온거 빼고는 날씨까지 완벽해서 그냥 모든 것이 좋았다는.
평소와 달리 섬 여기저기를 헤짚고 다니지도 않았다. 비티 레부 Viti Levu 섬에서 나디 Nadi 마을 근처 일일투어 한번, 바누아 레부 Vanua Levu 섬에서 리조트 근처 폭포랑 인근 마을 방문이 이번 피지 관광의 전부.
어쨌든 그래서 이 나라를 구석구석 제대로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피지는 전반적으로 바누아투에 비해 마을들이 현대적인 느낌이었다. (물론 많이 낙후된 지역도 있었지만) 숙소도 리조트도 무난한 가격대부터 초호화까지 다양하며, 바닷속, 정글 등의 자연은 물론 각종 편의 시설도 괜찮은 편. 그러나 무엇보다 이곳이 더 매력적인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태평양 섬에 비해 물가 비싸지 않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바누아투 물가가 더 비싸다.) 오래전 부터 휴양지로 개발되어 현대적인 요소가 자리 잡아 바누아투 같이 신비로운 임팩트는 없었지만 어떤 취향(휴양지 타입, 배낭여행 타입, 어드벤쳐 타입 등)을 가졌던지간에 흥미를 끌만한 요소가 있는 것 같다.
10. 사모아 한달살기 : 내가 아는 이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여긴 1주 정도면 딱 좋았을 곳이었다.
주요 섬이 두개인데, 크기가 워낙 작아서 천천히 구경하며 돈다고 해도 각 섬당 인심좋게 3일이면 충분했다. 섬 두개를 다 본다면 넉넉 잡아 일주일이면 구석구석 다 보는 그런 곳.
그러나 우리가 사모아에서의 한달은 길다고 느꼈던 이유는 섬이 너무 작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돌아다니기 보다는 집앞의 풍경을 즐기는 것이 우리 여행 컨셉이라서 섬이 작은 것은 크게 상관이 없었다. 사모아가 힘들게 느껴졌던 이유는 바로 슈퍼마켓 때문.
이곳에서는 신선한 식재료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슈퍼 크기는 엄청 큰데, 막상 들어가보면 우리가 아는 신선한 식재료는 거의 없거나 수입산이라 브로콜리 한통에 막 1만 5천원, 파프리카 하나에 1만원씩 팔더라. 배탈쟁이 오이군은 아침에 요거트를 꼭 먹어야 하는데, 한국에서 4-5천원 가량 하는 대형 요거트 한통이 여기서는 무려 2만원. 게다가 유제품이 맨날 있는 것도 아니다. 뉴질랜드에서 배가 들어 오는 날부터 약 일주일간 슈퍼마켓에서 볼 수 있다는.
그렇다고 현지인이 주로 먹는 야채를 다 파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제일 많이 먹는 타로잎은 집집마다 기르기 때문에 수퍼마켓이나 시장에서 아예 팔지를 않는다. 고기도 그들은 집 마당에 닭과 돼지를 풀어 키워 잡아 먹기 때문에 수퍼마켓에는 질이 그저 그런 수입 양고기와 소세지 등을 팔았다. 질이 괜찮은 소, 돼지 고기는 상당히 비싸더라는. 수퍼마켓에 들어서면 대부분의 공간을 메우고 있는 것들은 전부 장기보존 냉동식물과 인스턴트 식품으로 그들의 비만율이 왜 세계 10위권 안쪽인지 이해가 가는 풍경이 펼쳐진다. 기본적으로 많이 먹는 문화라지만 이 가득 쌓인 인스턴트 식품들이 한자리 차지 함이 분명할듯…
어시장이 있긴 있는데, 오전 9시에 문을 닫고, 무엇보다 숙소에서 너무 멀었다. 과일시장에는 과일 또는 타로(토란)와 브레드 플룻 이외의 야채는 거의 없더라. 파는 양도 많아서 냉장고 보관도 힘들고, 그렇다고 매일 외식할 만큼 물가가 싸지도 않다. 한끼에 구멍가게같은 음식점이나 시장에서 저렴한 것을 먹어도 보통 1-1.5만원 선인데다가 튀김음식이 주메뉴. (ㅠ_ㅠ 누구는 신발도 튀기면 맛있다던데, 나는 튀김류를 좋아하지 않는다.) 스테이크, 파스타류는 2-3만원이 훌쩍 넘어가기 때문에 식사는 대부분 집에서 해결 했는데, 한달동안 타로(대형 토란)와 브래드 플룻(구우면 빵 맛이 나는 열매), 플랜틴 바나나(딱딱해서 감자처럼 요리해 먹는 초록 바나나), 코코넛, 쌀밥, 맛없는 냉동 고기, 그린 파파야 샐러드 뭐 이런 것만 먹다보니 이거…힘들더라…
사실 사모아는 유명한 토 수아 To Sua의 사진 한장에 홀딱 반해 묻지마 여행지로 끼워 넣은 장소였는데, 이미 바누아투에서 더 멋진 블루 홀을 여러개 보고 와서 토 수아도 사실 임팩트가 좀 약했다. 그냥 내려가는 사다리만 후덜덜 했다는.
섬 자체는 평화롭고 아기자기 했다. 바누아투같이 파격적인 아름다움까지는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안정된 느낌의 온화한 곳이었다. 집집마다 자기 집 주변을 엄청나게 깨끗하게 청소해 놓고, 예쁘게 꽃과 나무를 심어놔서 (안그러면 마을 커뮤니티에서 벌금을 문다고) 차타고 한바퀴 돌며 구경하기 좋다. 여행자 말고 거주하는 외국인도 거의 없다보니 위화감도 덜하고, 전체적으로 시국이 안정된 느낌. 들개가 좀 많았지만 대부분 온순하고(사람을 개! 좋아함, 특히 외국인을), 마을 길도 뉴 칼레도니아에 비해 더 안전한 인상을 받았다. (그래도 너무 늦은 밤엔 혼자 나다니지 말라고 함, 동네 사람이…)
전체적으로 이 나라가 뭐가 나빴던 건 아닌데, 우리는 크게 감명을 받지는 못했다. 해변도, 블루 홀도, 폭포도, 화산 지대(제주도랑 아아주 비슷)도, 블로우 홀도 전부 어딘가 이미 본 듯하고, 규모나 풍경이 무난한 정도였기 때문. 개인적으로는 이미 피지나 바누아투 등을 봤다면 태평양 섬 중에서 여긴 그냥 건너 뛰어도 될 뻔 했다 싶은 곳이다.
11. 뉴질랜드 북섬 3개월 : 추억속으로의 여행
열대 섬들의 끝없는 여름 속에서 네 달을 보냈더니 진이 빠져버렸다. 어릴적엔 열대 지방에 사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내가 나이를 먹은 걸까 아니면 여지껏 지나온 모든 열대 섬에서 출몰했던 거대 바퀴벌레가 내 에너지를 다 뺏어 간 걸까.
사실 더운 걸 좋아하긴 하는데, 여름이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니 은근히 찬바람이 그립더라. 역시 나는 짜장면도 먹고, 짬뽕도 먹어야 하는 녀자. 그래서 쌀쌀한 뉴질랜드로 피신하기로 했다. 원래 쌀쌀한 곳 좋아하는 오이군이 두 손 들고 환영했음은 말할 것도 없고.
뉴질랜드는 감자와 오이가 아직 사랑과 우정사이에서 맴돌때 함께 여행했던 첫번째 장소라 우리에겐 매우 의미 있는 곳이다. 게다가 나에게는 첫 캠핑카 여행지이자 처음으로 친구들과 목적지 없이 한 달 간 떠돌아본 곳이라서 내 평생 가장 로맨틱한 나라로 기억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뉴질랜드로 돌아 간다니 은근히 두근두근.
장소는, 14년 전이기는 하지만 그때 남섬을 한달간 돌았으니 이번엔 북섬에서만 세달을 보내기로 했다. 그중에서도 오이군이 회사랑 화상미팅하기 힘드니 인터넷 좀 잘되는 곳으로 가자고 해서 수도인 오클랜드로 결정.
오클랜드는 수도라고 해도 서울에 비하면 매우 작은 도시지만 계속 작은 섬나라만 돌았더니 첫인상이 굉장히 현대적이며 거대하게 느껴졌다. ^^;
도착하자마자 사모아의 한을 풀기 위해 일단 신선한 야채로 실컷 뱃속을 채우고, 한식집도 많아서 김치찌개에 막걸리까지 걸치고 나니 곰에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소확행을 제대로 경험. 사실 나는 육식 주의자인데, 사모아에서 신선한 야채를 마음껏 못먹었더니 이게 또 은근 그립더라는.
오클랜드에서도 태즈매니아와 마찬가지로 총 3개월을 머물렀지만 주중엔 재택근무일 지언정 평범하게 일을 하므로 주말에만 인근지역 구경을 다녔다. 그리고, 2주는 캠핑카를 빌려 옛 추억을 곱씹으며 이곳 저곳을 구경했는데, 음…전체적인 소감은 북섬도 명불허전 뉴질랜드 답게 광활한 대자연이 멋지긴 하지만 남섬에 비해 5% 부족한 느낌? 뉴질랜드 남북섬을 다 둘러볼 시간이 없다면 그냥 남섬만 가도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북섬도 엄청 예쁘긴 한데, 이미 남섬을 보고 나서인지 계속 어디선가 본 듯하더라. 거기에 북쪽이라 따뜻하니 빙하와 빙하 호수가 없고, 들판도 남섬에 비해 차분했다. (나는 예쁘장한 것보다 거친 느낌의 자연을 좋아한다. ^^;) 아열대 식생으로 뒤덮힌 숲이 좀 특이하긴 한데, 역시 막 뇌리에 박힐만큼은 아니었고, 야생동물을 좋아하는 우리는 길에 동물이 별로 없는 것도 아쉬웠다.
대신 북섬에서 내가 가장 좋았던 것은 목소리가 예쁜 투이 Tui를 비롯해 앵무새, 키위새 등의 다양한 고유종의 새들과 서쪽 해변의 끝없는 검은 모래사장이었다. 가끔 해변을 파면 따뜻한 물이 나오기도 하는데, 제주도의 삼양해변 보다 색이 더 검고 규모가 비교 불가하게 방대하다.
아, 그리고, 글로우 웜도 있다. 물가 암벽틈이나 물이 흐르는 동굴에 사는 벌레인데, 이게 반딧불처럼 빛을 낸다. 반디는 약간 연두빛 도는 불빛이라면, 이건 은근한 하늘빛 도는 빛깔로 주변에 진주 목걸이 같은 줄을 쳐서 직접 보면 동굴안에 은하수가 지나는 듯 신비롭기 그지없다. (그러나 가까이 보진 말자. 징그럽다. 반투명하고, 긴 벌레라서…^^; ) 이 벌레를 나는 여기서 처음 봤지만 사실 뉴질랜드 남북섬에 모두 서식하고, 호주 동남부 일부지역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한다.
12. 타히티 10일 : 인생에 한번쯤은 이런 날도
여기도 피지처럼 온전한 휴가로 오게 되었다.
원래는 한달살기 하면서 일도 할려고 했는데, 이동네도 대왕 바퀴벌레가 나오고, 일을 할 만큼 인터넷이 잘 안된다길래 마음을 접고 그냥 휴가로 보내기로.
흔히 타히티로 부르지만 사실 타히티는 국제공항이 있는 섬 하나의 이름이고, 118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이 지역의 정식 명칭은 프렌치 폴리네시아 French Polynesia다. 뉴 칼레도니아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해외영토라 공식적으로는 프랑스어를 쓰는데, 수도에는 역시나 파리 억양을 가진 프랑스 사람이 많았다. 수도(주도)인 파페에테 Papéete는 프랑스 변두리 지역같았고, 나름 작은 도시 같은 느낌이 들더라. 그러나 타히티의 매력은 당연히 도시가 아니라 자연에 있다. 수도(주도)를 벗어나면 원주민들의 밀도가 부쩍 늘어나고, 그들의 언어가 훨씬 많이 들리기 시작한다. (원주민어는 총 9개가 있다고)
우리는 국제공항이 있는 타히티 Tahiti 섬과 그 옆의 모레아 Mo’orea 섬, 제일 유명한 보라보라 Borabora 섬에 갔는데, 사실 모레아에서 한달살기를 해도 될 뻔했다는 생각이 들더라. 인터넷 사정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을 뿐더러 (당연히 도시 같진 않지만), 바퀴벌레도 생각보다 없었으며, 신선한 식재료를 충분히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난한 가격대의 에어비앤비 숙소도 꽤 많이 있었다. 어쩌다 수도인 파페에테에 갈 일이 생긴다 해도 2만 5천원짜리 페리로 한시간 밖에 안걸리기 때문에 그렇게 큰 부담은 아니다. (다른 섬들은 비행기 타고 가야해서 훨씬 비싸다.)
단, 모레아는 수중환경이 좋다고 워낙 칭찬들을 해서 기대가 컸는데, 나는 보라보라의 수중환경이 훨씬 마음에 들더라. 대신 모레아는 영화 세트장 같은 산세가 단연 압도적이었다.
※ 영어로 스팅레이(=쏘는 가오리)라 불리는 색가오리는 몸통과 꼬리가 연결되는 부분에 화살처럼 날릴 수 있는 독침이 있어서 위험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성격은 매우 온순한 어종입니다. 독침을 쏘는 건 무섭거나 놀랬거나 모래 덮고 쉬고 있는데, 사람한테 밟혔을 경우입니다. 타히티의 가오리들은 사람에게 익숙해서 강아지같이 따라다닐 뿐 아니라 손에 날생선 조각을 들고 있으면 달라고 부비부비 애교를 떨기도 합니다. (엄청 미끈미끈 -_-;) 이빨이 없어서 물지도 않으니 먼저 다가오는 가오리들은 머리 부분을 쓰다듬어 줘도 괜찮지만 싫다고 도망가는데 붙잡고 놓아주지 않거나 물 밖으로 들어 올리거나 물 아래서 타고 다니면 놀란 가오리가 독침을 쏴버릴 수 있으니 주의합니다. 독 자체는 극심한 통증을 유발하는 정도지만 큰 가오리일 경우 날리는 침이 크고, 그게 사람의 몸통 부위, 특히 심장 부위에 박힐 경우 매우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크로커다일 헌터’로 유명한 호주 환경운동가이자 방송인인 스티브 어윈이 다큐멘터리 촬영도중 이 스팅레이가 쏘는 독침을 심장 부근에 맞고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보라보라는…
유명세 때문에 상당히 기대했는데…이거 완전….
기대 이상이었다. ^^;
사실 보라보라에 가면서 여행 쫌 해 봤다고 시선이 많이 시니컬 해진 우리는 유명한 이곳을 잔뜩 비평할 준비를 마음속으로 하고 있었던 듯 하다. 근데, 도착날 태풍이 온 듯 비바람이 몰아 쳤음에도 오잉? 이거…엄청 이쁘다? 비가 오는데도 이럴 수가 있는 건가. 그리고 다음날 해가 뜨고부터는 도무지 찔러볼래야 흠잡을 곳 없이 압도적이었던 아름다움에 완전히 굴복하고 말았다. ^^;
흐린 날에도 바다 아래 불이 켜진 듯 환하게 빛나던 멋진 물빛과 수백마리의 매가오리(이글레이 Eagle ray)에 둘러 싸였던 스쿠버 다이빙, 역시 수백마리의 블랙 팁 상어한테 둘러 싸였던 스노클링 그리고 방갈로 앞에 강아지처럼 왔다갔다하는 색가오리(스팅레이 Sting ray)들까지 온통 신비로움 그 자체. 그림같은 산세는 또 어떻고. 게다가 난생 처음 가본 레알 수상 방갈로는 가격이 비수기인데도 겨우 4일에 한달치 생활비를 다 깎아 먹었지만 정말 후회없는 선택이었다. 뉴 칼레도니아는 좋아도 물가가 너무 비싸서 다시 가지는 못하겠다 싶었는데, 여기는 거기보다 물가가 한술 더 떴지만 어떻게든 돈벌어서 다시 가고 싶은 곳이다. ^^;
아아아아…나 좀 저기다가 다시 가져다 놔 주라… – 인터콘티넨탈 리조트 보라보라
그러나 보라보라는 작은 현지인 마을을 빼고는 오직 리조트들 밖에 없어서 한달살기를 할 곳은 아니었다. 하고 싶다면 모레아 추천. 이 사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사모아에서 1주일만 휴가로 보내고 모레아에서 한달살기를 하는 건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13. 이스터 섬 7일 : 외계인의 흔적을 찾아서
이스터 섬은 하마터면 못갈 뻔 했다.
위치가 타히티와 칠레 본토의 중간쯤에 있는데, 들어가는 비행기가 칠레에서만 있다고 해서 일치감치 포기해 버렸던 것. 그런데, 뉴 칼레도니아에서 다이빙하다 만난 총각이 일주일에 한번씩 타히티에서도 들어가는 비행기가 있다는 꿀정보를 흘려주는게 아닌가! 덕분에 인생 여행지에 예정보다 빨리 가 볼 수 있게 되었다. 역시 이래서 사람들과의 교류 및 정보 교환이 중요하다. ^^;
이스터섬은 차암~~~~ 평화로운 곳이었다.
이스터섬은 현재 칠레령인데, 우리는 남미쪽으로 들어갈 게 아니라 타히티로 다시 나왔다가 미국으로 들어갈거라 비행기일정에 맞춰 일주일을 꼬박 이 섬에서 보내게 되었다. 근데, 섬이 워낙 작아서 일주일간 섬을 돌고, 돌고 또 돌고… ^^;; 이틀이면 다보는 작은 섬인데, 인근 부속 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을이 큰것도 아니고…정말 나같이 사진 중독자가 아니라면 힐링 말고는 할게 없더라 ^^;; 덕분에 나는 사진을 질리도록 찍었고, 오이군과 함께 섬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게 되었다. 모든 모아이 방문은 기본이고, 다이빙, 스노클링, 승마, 화산 트레킹, 별 관측, 각종 동굴 트레킹, 들판 트레킹 등등을 했는데도 시간이 남아 돌아서 좋았던 곳은 두번씩 다녀오는 호사를 부리기도 했다. (시간부자) 그래도 결국 시간이 남아서 하루는 마을을 배회하다 그냥 해변에 앉아 멍때리기로 보냈다는. ^^;;
이스터 섬은 넉넉하게 4일 정도로 일정을 잡으면 좋을 것 같다. 매우 느긋하게 트레킹+렌터카로 돌아도 그정도면 충분히 본다. 물론 아무생각 없이 힐링이 필요하다면 길게 있어도 상관 없지만 말이다. 물가는 칠레 본토 보다는 비싸지만 한국보다 조금 밑도는 수준이고, 미니 사이즈 마을이지만 나름 예쁜 카페도 몇 개 있으며, 치안도 좋다. 타히티처럼 ‘우와~다시 오고 싶다아~’ 하는 곳은 아니었으나 매우 좋은 기억으로 남은 곳이다.
다음편에서는 태평양 섬나라 호핑투어가 끝나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갑니다.
미서부에서 서부영화 따라잡기와 감자의 로망, 바하마에서 깜찍이 돼지들과 바다 수영하기 그리고 오이군의 로망, 갈라파고스 다이빙 이야기 등이 이어집니다.
아.. 정말 여행 갬성 완전 흔들어 버리시네요~ 사모아 여행기는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데이지님 ^^
후아…답글 남겨주셔서 저도 오랜만에 글 다시 읽었는데, 이 여행이 왜케 아득하게 느껴지는지. 기분에 코로나 이후로 시간이 20년은 흐른거 같네요 ㅋㅋ
그만 블로그 겨울잠 자고 사모아를 비롯해서 태평양 섬들 여행기 얼른 다 써야겠어요! 곧 다시 여행길에 오를 날을 기대하며…
좋은 하루 되세요!
두 분 다 담긴 사진들이 꽤 많은데 타이머나 리모트로 찍은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잘 찍은 사진들이네요. 혹 여행시 동행하는 사진 찍는 분이 따로 계신지요?
사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독사진은 서로 찍어주고, 투샷은 타이머나 리모컨이 아니라 ‘인터벌 모드’로 찍습니다. 삼각대에 카메라를 설치해 두고, 촛점을 맞춘 후 3초 간격으로 계속 사진이 찍히게 두는거죠. 그리고 저희는 그 촛점 맞춰 놓은 곳에서 위치 이동은 하지 않고 포즈만 계속 바꾸는겁니다. 그러다보면 게중에 자연스러운 몇장이 걸려요 ^^ 나중에 지울 것이 많아서 일이 좀 많지만 리모콘이나 타이머 사진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찍을 수 있어서 좋더라고요. 리모트 컨트롤은 누르는 손이 은근히 부자연 스럽고, 타이머는 표정이 경직되어 있으며 몇장 찍고 나면 왔다 갔다 달려다닌 사진사가 지쳐보이죠 ㅋㅋ
나중에 단체사진 찍으실 일 있으시면 인터벌 모드 한번 이용해보세요 ^^
비밀댓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오이군 사진 잘 찍는데, 제가 너무 찍어대니 질려서 그런가 이제 잘 안찍으려고 해요. 결혼전엔 안시켜도 많이 찍어줬었는데…아니면 애정이 식은 건지…또르르… ㅋㅋㅋ
사진가에서 모델로 전업하는 것 같아 보여요 ㅋㅋ
전 이제 어디 가는거 다아 구찮습니다
집밥이 최곤거처럼 장돌뱅이 노매드 라이프는 졸업을 해야지 싶네요. 잘보고 갑니다.
ㅋㅋ 그러게요. 저도 평생 떠돌지 싶었는데, 귀찮아 지는 때가 오네요. 그러다 또 좋은 곳에 가면 우워어 지구를 다 돌아야지 했다가 피곤하면 이제 정착해야겠다 했다가 왔다 갔다 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이정도면 됐다 싶은 때가 올 것 같아요 😆 뭐든 다 행복하자고 하는건데 무리할 필요 없죠. 특히 여행은요^^
차포님도 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방금 저도 5ds하나 싸게 들였습니다. 아직 이 바디 쓰시지요?
네네, 오막포 나오고 잠시 흔들렸지만 저는 일하는데도 5Ds면 충분해서 그냥 말았습니다. 화소도 높아서 대형인쇄할 때도 좋고, 익숙해서 다 좋아요. 무거운것도 뭐 이제 그럭저럭 익숙 ㅋㅋ
근데, 싸게 들이셨다는 건 부럽네요. 저는 나오고 얼마 안되서 사가지고 비싸게 들였는데 ^^;;
바다 사진들에 마음이 이미 비행기ㅜㅜ 저만 당할 수 없으니 남편에게 공유해야겠어요ㅋㅋㅋ
아하하. 내친김에 여행 계획 및 예약까지 이어지길 바랍니다 ^^;; 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