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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Log | 평범해서 소중한 일상
비오는 날 우산을 쓰지 않는 남자
2014. 7. 10. 01:30

깨어나라, 네오!

네가 알던 세계가 전부가 아니다

 

 

나는 어릴 적, 비 내리는 여름날을 좋아했다. 

학교 갔다 오는 길에 비가 내리면, 물 웅덩이가 생기는 곳을 찾아, 한참을 첨벙거리다가 돌아가곤 했다. 물론 어머니는 더러우니 그러지 말라 하셨지만, 세상에 그렇게 재밌는 놀이가 또 있을까? 혼날걸 알면서도, 여름에 비만 오면, 이성을 잃고 물웅덩이로 뛰어들곤 했다. 그러나 그때에도 내가 사수 했던 한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산이다. 어차피 물웅덩이에서 첨벙거리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젖게 마련인데, 그래도 우산은 꼬옥 받치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 비가오면 누구나 우산을 쓰는거니까. 내가 나고 자란 한국에선 그게 당연한 거였으니까.

 

그런데, 내가 처음 장기체류한 해외, 호주에서 나에게 당연한 많은 것들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되었다.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그중에 하나가 우산이다. 이곳에서는 비오는 날 우산이 필수가 아닌, 옵션이었던 것이다. 비가오는데, 이슬비도 아니고 주룩 주룩 오는데, 사람들이 우산을 쓰지 않는다. 물론 쓰고 다니는 이들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벼운 비쯤은 그냥 맞고다닌다. 어쩌다 비가 거세게 오면, 건물 아래 서서 살짝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적당한때 나가 그냥 대충 맞으며 다니는 것이다. 참 신기했다. 왜 우산을 쓰지 않는걸까? 이유를 묻자 돌아오는 대답은 간단했다. 

뭐 그냥 물인데 맞으면 좀 어때?

 

그때 나는 호주사람들만 특이한가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별로 특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후 살게된 스위스에서 깨닫게 되었다. 이곳 사람들에게도 우산이 옵션이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우산을 쓰고다니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닌데, 밖에 있다 우산이 없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은 없다. 

 

한번은 한국의 가족들이 스위스를 방문했다. 그들과 함께 들판에서 바베큐를 하고 있었는데, 맑은 하늘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 다행히 이슬비여서 피워놓은 불이 꺼질 것 같지는 않길래, 오이군과 계속해서 고기를 굽고 있는데, 한국의 가족들이 허둥지둥 차안으로 달려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때 나도 이미 몇년간의 호주와 스위스 생활로 비가 오면 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기에, 저들이 왜저러나 싶어 쳐다봤던 기억이 난다. 물론 한국의 가족들은 멀뚱이 불가에서 바라보는 오이군과 나에게 빨리 차로 달려오라며 아우성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비가오면 나는 당신을 버리고... 
나는 나쁜 여자가 아니다

 

그런데, 오이군은 조금 극단적인 케이스이다.

그에게 우산은 그저 옵션이 아니라 아주 아주 귀찮은 존재인 것이다. 비가와서 우산을 건네주면, 왜 귀찮게 이런걸 주냐며 극구 마다한다. 가끔 생쥐같이 젖는게 보기에 안스러워서, 다시 우산을 권하기라도 하면, 도리어 나에게 짜증을 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미처 깨닫지 못한 한가지가 있는데, 나는 이래뵈도 꽤 로맨틱한 여자란 말이다. 비오는 날 둘이서 우산을 나눠쓰며, 꼬옥 달라붙어 걷는게 얼마나 낭만적이란 말인가. 서로 덜 젖게 해주려고, 조금씩 우산속 자리를 양보하며 알콩 달콩 집에 간다. 그런데, 같이 우산을 잘 쓰고 왔다고 생각한 그의 반대편 어깨가 흠뻑 젖어 있기라도 한다면, 감동이 쯔나미로 몰려와 사랑스럽기 그지 없을 텐데...

 

맨날 티격 태격 하시는 우리 부모님도 비 오는 날만은 다정 다감하시단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은근히 오이군에 건네보았으나, 그의 반응은 무슨 그런 외계인 닭쫓는 소리를 하냐고.

별로 로맨틱해 보이지도 않고, 그저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어차피 우산을 나눠쓰면 둘다 반대쪽 어깨가 조금씩 젖기 마련인데, 그럴바에야 그냥 나에게 우산을 다주고, 자기는 한쪽 젖으나 양쪽 젖으나 똑같으니, 안쓰고 가겠다는 것이다. 게다가 같이 쓰면 그 귀찮은 우산은 키큰 자기가 들어야하는데, 그건 불공평하다고 한다...-_-; 

그래서 둘다 젖지 않게 커다란 우산을 사겠다고 했더니, 자기는 무언가를 손에 들고서 길을 걷는다는 것 자체를 매우 싫어하는데, 커다란 우산은 또 얼마나 무겁겠냐며 안된다고 일축한다. 급기야는 우산을 내가 들겠다고 했더니, 니 키가 작아서 우산이 자기 머리에 닿아 불편하기 때문에 그것도 안된다고 한다.

 

 

에효...그래. 그럼 로맨스는 집어 치우고, 각자 우산을 하나씩 드는 것은 어떠냐고 했더니, 그러면 오이군 본인이 우산을 쓰건 안쓰건, 감자, 너에게는 차이가 없는데, 왜 굳이 자기에게 우산을 주려하냐고 묻는다.

왜냐하면, 고집센 오이군아. 우산을 쓰지 않으면, 한국에서는 가끔 난감하기 때문이다. 음식점에 가는데, 생쥐처럼 쫄딱 젖어 있으면, 주인아저씨가 얼마나 싫어하겠는가. 가게안에 물을 뚝뚝 흘리고, 의자는 푹 젖을텐데...택시를 타도 민폐, 버스를 타도 마찬가지. 추위에 떨다 감기 걸릴 수 있다는 문제는 제껴두고라도 말이다.

그러나 오이군은 음식점 의자는 식사를 마칠때 쯤엔 체온으로 다 마를 것이며, 비오는 날은 택시를 타지 않을 것이고, 버스와 지하철에서는 서있으면 된다고 한다. 자기는 건강해서 감기도 안걸린다며...

더 말해봐야 청개구리 심보만 발생하는 걸 알기때문에 더이상 언쟁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비가 오면,

우리는 머나먼 당신이 되어,

저어만치 떨어져 각자의 시간을 걷는다.

나는 우산을 쓰고,

오이군은 비를 맞고.

 

 

❝ 어? 비오네? 오늘은 안녕. ❞

❝ 오늘은 니 생일이니까 내가 같이 우산 써줄까? 선물이야~ ❞

❝ -_-;; 뭐...뭐니. 선물은 물건으로 줄래? 현금도 받아줄께. ❞

 

그런데, 사실 나도 호주에서부터 어느 순간인지 이슬비는 그냥 맞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 생활 3년쯤 되니, 요즘엔 오이군이 장대비가 오면 우산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우산을 각자 하나씩 들어서 여전히 멀찌감치 떨어져 걷지만, 적어도 비오는 날 음식점에 들어갔을 때 주인 아저씨에게 눈치는 덜보인다. ^^

 

❝ 마누라, 우산은 각자 하나씩. 집에 우산이 남아도는데, 왜 나눠써? ❞

❝ 알았다고 알았다고. 멀리 떨어져 걸으세요. 물튀겨~ ❞

 

 

Rainy day fin.